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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허수아비
미류 나무 꼭대기에 걸려있던 구름이 없어졌다. 그만큼 하늘이 높아진 것인가. 나는 새파랗게 빛나는 가을 하늘을 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덥지는 않았다.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하고, 땀도 나지 않았다. 논에는 고개 숙인 벼들이 가득하고, 수진이네 담벼락 밑에는 누런 큰 호박이 쳐져 있었다. 정말 가을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하는 날이었다.
“선재, 논에 가니?”
두엄을 뒤집으시던, 현선이네 할아버지가 아는 척을 하셨다.
“네, 참새가 극성이라서요. 지키고 있지 않으면 큰일이 나요.”
“그래. 얼른 가보렴. 요즈음 참새들은 허수아비를 겁내지 않아 큰일이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요즈음 참새들은 유난히 약았다. 허수아비는 아예 상대도 안하고 사람이 와도 쉽게 달아나질 않는다. 얼마 전엔 성철이네서 꾀를 써서 사람과 똑같은 마네킨을 논 한가운데에 놓기도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한 삼일동안은 마네킨에 속아 좀 멈칫거렸지만, 그 후로는 오히려 더 설치고 다녔다. 오히려 사람을 조롱하듯 마네킨의 머리에 똥을 잔뜩 싸놓기만 했다.
성철이네 일이 있은 후론, 동네 사람들은 모두 논에 직접 나와 논을 지키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온 식구가 총동원 되어 논을 지켰다. 그 덕분에 나도 학교가 끝나면 논으로 달려가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논에 마악 도착했을 때, 형은 긴 장대를 휘두르며 참새를 쫓고 있는 중이었다. 참새들은 장대를 피해 이리저리 날아오르기는 했지만, 멀리 달아나지 않고 계속 논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한 녀석들이야. 어쩜 저렇게 끈질기냐? 아무리 쫓아도 안 된다.”
형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 송글 맺혀있었다. 참새 때문에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고함도 지르고, 때때로 장대로 휘둘러 줘야 한다. 알겠지? 여간 약은 놈들이 아니야.”
형은 나와 교대하고 돌아가는 순간에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참새가 워낙 극성이다보니 마음이 안 놓이는 모양이었다.
참새들만 없다면, 정말 좋은 오후였다. 간간히 바람도 불고 나무 밑은 시원해서 잠이 솔솔 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 원수 같은 참새들 때문에 맘 놓고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내가 고함을 지르면 사라졌다가, 잠시 후 눈치를 보며 날아오는 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옛날에는 참새들이 허수아비를 무서워했다던데, 지금은 오히려 허수아비의 어깨에 앉아 잠을 잘 정도이니... 논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는 허수아비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만약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허수아비처럼 말하고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저까짓 참새들은 문제도 아닐 텐데...’
나는 허수아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일자로 다문 입술, 바람에 펄럭이는 소매... 마치 말하고 싶다고, 움직이고 싶다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넌 할 수 있어. 내가 말 할 수 있도록 도와줘. 넌 날 도울 수 있어.”
허수아비의 외침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래. 난 할 수 있어. 허수아비가 말하게 할 수 있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음기. 녹음기만 있으면 허수아비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워어이! 워어이! 저리 가라! 참새들아.”
허수아비의 가슴 속에 숨겨진 녹음기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허수아비의 어깨위에 앉아 졸던 참새들이 모두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효과 만점인 것이다.
내가 생각해낸 이 고함치는 허수아비는 아주 큰 인기를 끌었다. 현선이네도, 수진이네도 모두 허수아비에게 녹음기를 설치했다. 성철이네는 마네킨에 녹음기를 설치해서 참새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온 동네 허수아비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분에 사람의 수고는 훨씬 줄게 되었다. 가끔씩 한번만 논에 들려 참새를 놀라게 해주면 되었던 것이다.
“워어이! 워어이! 저리가라! 참새들아!”
논 한가운데에서 힘차게 외치는 허수아비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움직일 수도 있게 해줄게!”
나는 허수아비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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