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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는 깊이를 잴 수 있는 삽
하늘엔 펄럭이는 만국기, 운동장에는 청색과 흰색의 큰 깃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동회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학교에 다니는 보람을 이야기하라면 딱 세 가지로 잘라 말할 수 있어.”
“그게 뭔데?”
“그건 뻔하지 뭐. 소풍, 방학, 운동회. 그렇지?”
“맞았어! 그 세 가지가 나를 학교에 다니게 하는 거라고. 아! 드디어 내일이 운동회로구나!”
광렬이는 몸까지 부르르 떨어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긴 놀생놀사(노는 것에 죽고 노는 것에 사는)를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광렬이에게 운동회는 감격해마지않는 대 행사이기도 할 것이다.
“운동회에선 뭐니 뭐니 해도 릴레이 달리기가 최고더라. 긴박감이 넘치고 역전에 역전!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지 않냐?”
“나는 줄다리기하고 큰 박 터트리기가 제일로 좋더라. 그건 단체경기니까 전부 할 수 있잖아. 나같이 운동을 못하는 사람도 전부 하니까 얼마나 좋냐?”
평소에 샌님같이 조용하던 재민이 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상품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정말 즐거운 날이지. 하지만 말야. 지금 우리가 이렇게 수다를 떨고 있으면, 내일 운동회는 못할지도 몰라. 저 앞에 백 미터 트랙도 그려야 하고, 큰 박을 세울 기둥도 세워야 한단 말야.”
나는 얘들 앞에 나서며 줄자를 펴보였다.
“저 봐. 선생님께서는 벌써 만국기를 거의 다 다셨어.”
파란 하늘 아래서, 만국기는 바람에 펄럭이며 우리에게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 얼른얼른 해치우자.”
광렬이는 내 손에서 줄자를 받아 들곤 씩씩하게 앞장서 걸어갔다.
“하여간 광렬이는 저런 일에는 대장이라니까. 산수문제 풀 때는 제일로 꼴찌면서, 몸으로 하는 일엔 늘 일등이야.”
경상이의 말에 우리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광렬이의 뒤를 쫓았다.
학교 자연동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 뽐을 내고, 고추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6학년 교사로 가는 길목에는 하늘하늘한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어때? 근사하지?”
광렬이는 운동장을 가로 질러 그어진 흰 선을 가리키며 씨익 웃어 보였다.
“내가 손수 그린 이 트랙에서, 내가 우승 한다 이 말이야. 어때 멋있지 않냐?”
광렬이는 칼 루이스처럼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뛰는 모습을 흉내 냈다. 검게 그을린 피부나 짧게 깎은 머리가 아프리카 토인 같아서, 우린 또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운동회 준비는 그럭저럭 끝나가고 있었다. 청군과 백군의 개선문이 세워지고, 심사위원석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고싸움에 사용될 큰 고도 거의 다 만들어졌다.
“와, 선생님께선 빠르시구나. 벌써 저 고를 다 만드셨네?”
“그렇구나. 우리도 빨리 해야겠다. 흐음, 이곳과 저곳에 두개의 구멍을 파면되는 건가?”
우리는 삽 한 자루를 어깨에 걸고는 운동장을 쳐다보았다. 하얀 X표가 두개 그려져 있어, 큰 박을 세울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한 60센티 깊이로 파라고 했는데... 60센티면 어느 정도야?”
“글쎄? 한 이 정도쯤인가?”
재민이는 팔을 어깨넓이로 벌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확하게 알면 좋을 텐데...”
나는 재민이의 팔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필요한 수치에 맞추어 깊이를 재가며 파는 것이 더 편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별도의 자나 측정기가 없이 간편하게 땅의 깊이를 측정하며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삽으로 한참 파다가 자로 재고, 다시 파고하는 것은 불편한 일인데...’
나는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다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광렬이 조차도 줄자를 선생님께 갖다 드렸기 때문에, 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어떨까? 내가 가진 것은 지금 10센티 미터짜리 자밖에 없는데...”
잠시 후에, 재민이는 머뭇거리며 작은 꼬마 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놨다.
‘10센티?’
나는 삽자루와 그 꼬마 자를 한참동안 번갈아 보았다.
“그래 맞았어! 삽자루에다 길이를 표시하면 되겠다. 경상아 네가 가진 매직 좀 줘봐!”
나는 삽자루에다 십 센티미터 씩 끊어가며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 번 정도를 하자, 삽은 어느새 커다란 1미터짜리 자가 되었다.
“자, 어때. 이렇게 표시를 해두고 땅을 파면 쉽겠지? 땅을 파면서 바로 깊이도 측정할 수 있으니 말이야.”
재민이와 경상이는 이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었다.
“그래! 그것참 멋지다. 아주 훌륭한 삽이야. 내일 땅파기 시합이 있어도 너끈하게 우승할 수 있겠다.”
“맞았어!”
우리는 하늘을 향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금방이라도 하늘이 내게로 쏟아질 것 같았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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