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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필기 겸용 지우개
맑은 공기와 따뜻한 햇볕.
항상 답답한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우리들에게, 야외로 나가는 일은 항상 가슴 설레는 꿈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 달에 한 번 있는 백일장 겸 사생대회를 애타게 기다린다.
백일장의 날이 가까워 오면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흥분상태에 빠져 버린다. 몇 날 몇 일을 온통 사생대회며 백일장 이야기로 지내는 것이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특히 글짓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백일장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푸른 잔디에 앉아 원고지를 보고 있노라면 모든 세상이 내 것만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은숙아, 지우개 좀 빌려줘.”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지원이가 팔을 툭툭 쳤다. 그 바람에 놀라서, 나는 공상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아아! 한참 멋있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난 속으로 무척 아쉬워하며 지원이에게 지우개를 건네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온통 제 할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풀밭에 엎어져서 글짓기에 열중하거나, 이젤 앞에서 열심히 붓을 놀리는 등 모두다 열심이었다.
‘아! 이런 들판을 말을 타고 달리면 어떨까?’
나는 눈앞에 한 떼의 양들이 지나가는 광경을 그려보았다. 그러자 그곳은 바로 남미의 넓은 초원이 되었다.
바람에 따라 풀잎이 흔들리고, 그사이에서 붉은 꽃이 수줍게 인사를 했다. 멀리서 말울음소리가 들려오고, 귀를 쫑긋 세운 토끼가 앙증맞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작은 새가 내 곁으로 날아와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은숙아!”
“앗, 깜짝이야!”
너무나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토끼도, 작은 새도, 모두 없어지고 낯익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원이의 화난 얼굴이 커다랗게 보였다.
“어이구, 시인 아줌마! 정신 차려요.”
지원이는 커다란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그때까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지원이의 잔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너 때문에 나는 그림을 다 망쳤잖아. 어떻게 할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말을 해야 알지? 화만 내면 어떡해?”
진희가 너무 심하게 굴어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지원이는 나에게 지우개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지원이에게 빌려 주었던 것이었다.
‘아뿔싸!’
그 지우개를 보는 순간 나는 나의 실수를 깨닫게 되었다.
지원이는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꽤 까다로운 편이었다. 지우개도 꼭 미술용만 고집하곤 했다. 일반 지우개로 지우면 도화지에 보풀이 생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내가 그만 공상에 빠져 무심결에 보통 지우개를 건네준 것이다.
‘내가 아무리 실수를 했다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화를 낼 수가 있담!’
나는 지원이의 심한 행동에 섭섭해져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서 또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림만을 벗삼아온 지원이에게 내가 너무 심했구나.’
나는 지원이의 등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발밑에는 미술용지우개와 필기용 지우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쩐지 내 눈에는 그 두 지우개가 지원이와 나로 보이었다.
‘사이좋게 악수를 하면 좋으련만...’
나는 지우개를 집어들고 서로 맞붙여 보았다. 그러자 내 눈에는 그것들이 서로 사이좋게 악수를 나누는 듯이 보였다.
‘악수라...’
나는 흐뭇하게 그것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지우개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하였다.
‘하나로 합쳐진다. 맞아! 바로 그거야!’
나는 그 순간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자봐! 지원아, 이 두 지우개를 서로 맞붙이는 거야. 그러면 지우개가 하나가 되지? 한쪽으로는 그림을 그릴 때 쓰고, 다른 한쪽으로는 글씨를 지울 때 쓰면 된다고...”
나는 자랑스럽게 지우개를 지원이 앞에 내놓았다. 그러자 지원이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날 위해 이런 멋진 생각을 하다니... 다시는 너에게 심하게 굴지 않을 께.”
지원이는 지우개를 손에 꼭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그보다 우리 약속하자. 우리도 이 지우개처럼 꼭 붙어 있자고...”
난 새끼손가락을 쑥 내밀었다. 그러자 지원이도 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는 서로 손가락을 걸고 한동안 크게 웃었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그림 : 김 민 재(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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