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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이용한 두부 자르는 기구
온 집안이 기름 냄새로 가득 찼다. ‘타다닥 타다닥’ 파 써는 소리. ‘지글 지글’ 고기 굽는 소리.
아침부터 작은 숙모, 큰 숙모가 모두 오셔서 집안은 초만원이다. 모두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안방으로, 마루에서 마당으로 분주하게 다녔다. 손에는 커다란 광주리나 조그만 접시, 납작한 부치 개 뒤집개까지 온갖 부엌살림이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파, 양파, 두부 등 온갖 반찬거리가 쥐어 있었다.
“여보게 영민이 엄마! 나 기름 좀 집어 주게.”
“형님. 어떡해요? 고기는 이 정도면 다 익었을까요?”
“어째 이 국은 좀 짠 것 같은데?”
엄마와 작은 숙모는 음식의 간을 보며 계속 갸우뚱 거렸고, 큰 숙모는 먹음직한 동태 전을 뒤집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냈다.
일년에 네 번, 우리 집은 이렇게 하나의 커다란 주방으로 변하고 만다. 즐거운 추석, 더 즐거운 설, 그리고 할아버지⋅할머니 제삿날까지... 이 날들이 되면 멀리 전라도에 계신 고모님들도 올라오시고, 이름이나 촌수도 외기 힘든 피붙이들이 모두모두 모인다.
“시현아 뭐하니? 그렇게 멍하니 서있지 말고, 장독대에 가서 간장이나 퍼 오너라.”
“네, 고추장은 필요 없어요?”
물론, 대손님을 치루다 보니 나 역시도 정신없이 바빠지게 마련이다. 장독대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십 번씩 시장이나 근처 슈퍼로 뛰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북적거림이나 분주함이 싫지 않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지 못하기 일쑤인데도 괜히 즐겁고 흥분이 된다. 아마도 오래간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친척들 때문일 것이다.
“자, 시현아. 이 계란 좀 얌전하게 잘라 놔라. 제사상에 올릴 거니까 깨끗하게 해야 해.”
엄마는 하얀 계란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건네 주셨다.
날이 잘 선 칼과 뽀얀 달걀. 나는 소림사의 고수처럼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 칼을 집어 들었다.
‘아주 멋지게 해치워서 엄마한테 점수 좀 따야지.’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살살 칼을 움직여 나갔다. 그러나 상상외로 계란의 저항이 거세였다. 아무리 신중하게 하여도 노른자는 부서져 버리고 삐뚤삐뚤하게 잘라졌다.
“저, 엄마. 아무래도 제가 하기엔 좀 어렵네요.”
나는 귀볼 까지 붉히며 제멋대로 부서진 달걀을 내밀었다. 정말 처참한 기분이었다.
“옳아! 칼로 계란을 자르려고 했구나? 원래 칼로는 안돼는 법이야. 자, 엄마가 하는걸 봐.”
엄마는 가느다란 실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계란 위에다 놓고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계란은 깨끗하게 반으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어때? 깨끗하지?”
엄마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친구 집에서 본 달걀 써는 기구도 이런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었다. 물론 그것은 실이 아닌 가는 철사를 이용한 것이긴 했지만 성능은 비슷비슷 했었다.
나는 단숨에 계란 한 바구니를 몽땅 해치우고 기지개를 쭉 켰다. 정말 뿌듯한 순간이었다.
‘정말 편리하구나. 이런 원리를 딴 것에다 활용할 수는 없을까?’
실이 손가락에 팽팽하게 걸리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이것을 잘만 이용하면 아주 멋진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나의 시선은 큰 숙모의 손끝으로 집중되었다. 보드랍고 물렁한 두부. 숙모는 때마침 두부를 부치려 하고 계셨던 것이다.
‘맞아! 저거야. 두부도 계란이랑 비슷하게 깨지기 쉬어서 썰기 힘들어. 그러니 이 실의 원리를 이용하면 두부를 쉽게 썰 방법이 생길거야.’
나의 가슴은 두근두근하며 마구 뛰었다. 꼭 보물섬이라도 찾은 기분이었다.
‘그래. 실 대신 철사를 이용하고... 옳지! 석쇠처럼 철사를 엮어 놓으면 한번에 두부 한모씩 깔끔하게 자를 수 있겠다.’
나의 머리 속에서는 새로운 기구의 모양이 착착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로 잰 듯이 매끈하게 잘려진 두부조각이 그 기구에서 끊임없이 이어 나오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현아! 왜 그렇게 넋을 놓고 히죽히죽 웃고 있니? 얼른 할머니께 절을 올리지 않고.”
엄마가 낮게 나무라시는 소리를 듣고 나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제사상 위에는 할머니의 초상화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도 잘 생각나지 않지만, 할머니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절 귀여워 해주셨다죠? 할머니, 다음엔 제가 만든 기구로 예쁘게 썬 두부로 맛있는 부치 개를 해드릴게요.’
나는 최대한으로 예쁘게 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할머니께 약속을 했다.
어쩐지 먼 옛날 할머니의 따뜻했던 품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그림 : 김 민 재(만화가, http : //www.coolmorni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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