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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정 뽑개
하늘이 눈에 띄게 높아져 있었다. 간간히 고추잠자리의 날개 짓도 보이고, 해바라기도 꽃잎을 떨어뜨리며 잘 여문 씨앗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을의 한가운데였다.
나는 발걸음을 일부러 크게 떼어 놓으며 낙엽들을 밟거나, 예쁘게 물든 은행잎이나 단풍잎을 주워 모으며, 다가온 가을을 맘껏 즐겼다.
“오늘도 은행잎을 잔뜩 주어 왔구나.”
엄마는 내 손에 들린 노란 은행잎을 보며 싱긋이 웃으셨다.
“예뻐서요. 편지에 넣어서 아빠께 보낼래요.”
“그래. 아빠가 몹시 좋아 하시겠다.”
엄마는 내손에서 은행잎을 받아 드시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마도 아빠를 생각하시는 것일 게다.
아빠가 계시는 곳은 가을과 겨울이 없는 열대의 땅이다. 항상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어 단풍이나 눈은 생각도 못하는 곳이다.
아빠가 우리 식구와 떨어져, 그 낯선 땅에 계신지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간다. 아빠가 떠나실 때는 이곳은 여름이었는데, 어느 새 찬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빠를 생각하며 넋을 놓고 앉아있는 동안, 엄마는 망치를 들고 나오셨다.
“엄마. 뭘 하시려고요?”
“음⋯ 창문에 붙였던 방충망을 떼어야지. 이제 가을이지 않니.”
엄마는 망치를 들고 창문 앞으로 다가 서셨다. 여름내 모기와 해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었던 방충망은 흉하게 색깔이 바래어 있었다. 게다가 방충망을 창문에 고정시키느라 촘촘히 박아 두었던 압정들은 벌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아이고! 이게 잘 안 되네.”
엄마는 손에 잔뜩 힘을 쥐고 압정을 빼려 했으나, 계속 헛손질 이었다.
“참내! 엄마는 그걸 망치로 뺄 수 있겠어요? 못도 아닌데.”
나는 엄마의 헛손질을 보다 못해 참견을 하고 나섰다.
자세히 살펴보니 압정은 쉽게 빠질 것 같지 않았다. 너무 깊이, 그리고 너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어떻게 하지?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 필요 한데.”
“뭐 적당한 것이 없을까?”
나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때 쓰레기통에 들어있던 분유깡통의 뚜껑이 생각났다.
“그래 그것이면 되겠다.”
나는 쓰레기통을 뒤져 깡통 뚜껑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낮은 턱이 달려있어 충분히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뚜껑의 끝을 압정의 머리 밑에다 찔러 넣고 밑으로 살짝 젖혀 보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압정이 쑥쑥 빠져 나왔다.
“야 하! 생각한 것보다 훨씬 성능이 좋네!”
나는 신바람이 나서 계속 압정을 뽑았다.
“우리 소담이가 제법이구나. 엄마가 못해낸 일도 척척 하고.”
엄마는 대견스럽다며 내 손을 꼭 쥐셨다. 그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씀 하셨다.
“소담아. 여기서 그치지 말고, 이 뚜껑을 개량해서 더 멋진 압정 뽑개를 만들어라.”
“개량하라고요?”
“그래. 이왕 시작한 일이니 더 멋지게 다듬으렴. 아빠께 자랑거리가 될 거야.”
엄마는 활짝 웃는 아빠의 사진이 걸린 벽을 가리키셨다.
“좋아요. 해보겠어요.”
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하긴. 깡통 뚜껑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 보다는 좀더 쓸모 있게 개량하는 쪽이 더 나을 거야.’
나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기었다. 그러자 엄마가 들고 있던 망치가 생각났다.
“맞아! 망치의 끝처럼 깡통에도 홈을 파는 거야. 그러면 더욱 좋을 거야.”
나는 즉시 방으로 뛰어가서 분유 뚜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뚜껑의 한쪽을 역삼각형 모양으로 잘라내었다. 그랬더니 언뜻 보기에 돼지 발굽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것으로 직접 압정을 뽑아보니, 더욱더 쉽게 뽑아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불만스러웠다. 압정뽑개가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는 압정과 깡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바닥에는 서너 개의 압정이 떨어져 있었다.
압정을 뽑을 때, 압정이 얌전하게 서서히 뽑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메뚜기가 펄쩍 뛰듯이, 압정이 튕겨 날아가곤 했다.
‘뽑힌 압정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깡통에 자석을 붙여야겠다.’
나는 커다란 자석을 깡통의 중간 부분에다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압정을 뽑아 보았다. 그랬더니 예상대로 뽑힌 압정은 죄다 뚜껑에 얌전히 붙게 되었다.
“야호! 엄마 완성했어요.”
나는 개량 압정 뽑개를 높이 쳐들고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어디? 정말 쓸모 있게 만들었구나!”
엄마는 압정뽑개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칭찬해 주셨다.
“빨리 편지를 써서, 아빠한테 이 일을 자랑해야겠어요!”
나는 노란 은행잎과 압정 뽑개를 쥐고 환하게 웃었다.
나의 편지를 받고 기뻐하실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그림 : 김 민 재(만화가, http : //www.coolmorning.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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