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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초인종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눈은 벌써 발목까지 쌓였다. 그런데 집안에서는 인기척도 없고, 나는 대문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두 다 외출하고 아무도 없는 건가?”
나는 다시 초인종을 세차게 눌러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이 추워!”
나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잔뜩 몸을 웅크렸다. 이렇게 추운 밖에서 서성인지 벌써 삼십분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담을 넘어볼까 생각도 했으나, 그나마도 담장이 너무 미끄러워 포기해야했다. 그저 별 수 없이 누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눈은 끊임없이 내렸다. 아기의 주먹만한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계속 내려앉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눈 쌓인 비탈길을 마구 뛰어 다니며 즐거워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그 눈이 밉기만 했다
. 내 어깨 위로 쉼 없이 내리는 눈 덕분에 내 잠바가 축축이 젖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 엄마는 왜 이리 안 오시지?”
나는 엄마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대문을 잠가놓고 외출을 하다니... 게다가 이렇게 날도 춥고 눈까지 내리는데.
나는 너무나 서럽고 슬펐다. 정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기다리다 지쳐서, 내가 길에 주저앉을 만큼 녹초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집안에서 가느다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이 올 때가 지난 것 같은데.”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고모 댁에 가신 줄만 알았던 할머니가 집에 계셨던 것이다.
“할머니! 할머니! 문 좀 열어 주세요!”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머리 속은 추위로 텅 비어 버렸고, 다만 조금이라도 일찍 따뜻한 방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누구냐? 기태냐?”
점점 할머니의 발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나는 점점 더 흥분이 되어 문을 마구 두드렸다.
“할머니! 빨리 열어 주세요.”
문틈으로 할머니의 손이 보였다. 이제 마침내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는 것이었다.
“엉엉... 얼마나 추웠다고요.”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울어 제쳤다. 쌓였던 긴장이 풀리자, 맥이 탁 풀리고 너무나 서럽고 슬퍼졌다.
“에고, 내 손자 얼어 죽을 뻔 했구나. 이 할미가 주책없이 라디오를 너무 크게 틀어 놓아서 초인종 소리를 못 들었어! 이제 다시는 라디오 듣지 않을 거다.”
할머니는 내 볼을 싹싹 문지르며, 안절부절 못하셨다.
“어쩌나? 이 할미 땜에... 추웠지?”
내가 흰눈에 파묻혀서 오돌 오돌 떠는 바람에, 할머니도 꽤 많이 놀라신 것 같았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움푹 페인 눈, 축 쳐진 턱, 깊게 패인 주름살.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는 신식 할머니라도, 할머니는 할머니였다. 어느 새 많이 늙으셔서 귀도 어두워지신 것이었다.
“괜찮아요. 할머니, 좋아하시는 라디오는 계속 들으셔요.”
늙으신 할머니에게서 라디오라는 낙을 뺏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고는, 할머니를 안심 시켜드렸다.
하지만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방책을 연구해 보았다.
‘어떻게 할까? 초인종의 소리를 좀더 크게 나도록 해볼까?’
그러나 첫 번째 생각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조용한 때에 벨소리가 크게 들리면, 할머니가 깜짝 놀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리는 지금 정도가 딱 좋겠는데.’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다가 시각 장애인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맞아. 들리지 않으면, 보면 되는 거지!”
나는 초인종 소리는 종전대로 그냥 두고, 새로이 보이는 초인종을 만들기로 했다. 즉, 초인종을 누르면 불빛이 번쩍이도록 장치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생각 끝에, 경찰 순찰차에 얹어두는 비상등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라면 눈에도 쉽게 띄고, 장식으로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 되었다.
초인종 사건이 있은 뒤 삼일 후, 나는 전자상가에서 비상등을 구해서 초인종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비상등은 할머니 방의 라디오 옆에다 두었다. 할머니께서 라디오에 열중하시더라도 쉽게 보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로써 나는 대문 앞에서 덜덜 떨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도 맘 놓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할머니 방에서는 어김없이 라디오 소리가 흘러 나왔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그림 : 김 민 재(만화가, http : //www.coolmorning.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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