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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겸용 각도기
“20도, 30도, 70도...”
우리는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각도를 공책에 열심히 적었다.
“140도, 170도, 200도...”
선생님은 마치 염불이라도 외듯이 줄 줄 줄 읽어 내려 가셨다.
“음. 어디 세어봐라. 이제 한 20개 되냐?”
“훨씬 넘었어요. 25개나 되요!”
우리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일제히 합창했다.
“그래? 그러면 그만큼만 숙제다. 공책에다 깨끗이 그려 와야 해.”
그제 서야 선생님은 숫자 부르기를 멈추시고 입가에 미소를 띠우셨다.
우리 선생님은 전교에서 제일로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떠들거나 불평을 하면 어김없이 큰 고함소리로 꾸중을 하신다. 우리는 선생님의 커다란 덩치와 솥뚜껑만한 손에 지레 겁을 먹어 양순한 양처럼 항상 고분고분하다. 그래도 선생님의 고함소리는 좀 참을 만 하다. 그러나 선생님이 내 주시는 숙제의 양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정말 큰일이다. 나는 오늘 밤을 꼬박 세도 다 못할 것 같아.”
“너뿐만이 아니야. 어휴! 사회랑 국어 숙제도 산더미 같은데...”
우리는 땅이 꺼질 만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선생님은 너무 많은 숙제를 내주신다. 집에 가서 온종일 죽어라고 해도 다 못할 정도였다. 매일 공책 대여섯 장 정도의 숙제를 꼬박꼬박 해야 하는 것이다.
“딴 반은 숙제가 두장밖에 안된다더라!”
“이야! 정말 좋겠다.”
우리는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타박타박 걸었다. 멀리서 축구며 야구를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이라도 얼른 뛰어가서 같이 놀고 싶었지만, 산수숙제 걱정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 먼저 갈께. 얼른 가서 숙제해야지. 난 손바닥 맞기 싫어!”
나는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30도라...”
나는 먼저 산수 숙제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각도기와 자를 꺼냈다.
공책에 긴 직선을 그어 두고, 각각 각도에 맞는 사선을 하나하나 그려 나갔다.
‘어! 벌써 1시간이나 지났잖아? 아직 5개 밖에 못 그렸는데...’
나는 숙제를 하다말고 시계를 보고는 무척 놀랐다. 각도에 맞춰 사선을 긋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일단 직선위에 한 점을 찍고 그것을 기준으로 각도를 재어 사선을 그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각도기와 자를 번갈아 가며 사용해야 했다.
‘정말 불편 하군... 각도기로 각도를 재면서 곧바로 선을 그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각도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반달 모양의 플라스틱에 빽빽이 각도가 적혀 있었다.
‘이건 이미 그려져 있는 선의 각도를 재기에는 편하지만, 새로운 선을 긋는 데는 정말 불편해...’
선을 그으려면 각도를 재고 그것을 연필로 표시해야 하는데, 각도기는 반원의 밖에 에다만 표시할 수 있었다. 그러니 각도기의 크기보다도 작은 길이를 그으려면 꽤 어려웠다. 일단 선을 길게 그려놓고 다시 적당한 크기로 지워야하니 일을 이중으로 하는 셈이었다.
‘만약 각도기의 안이 뻥 뚫려 있다면 어떨까?’
나는 테두리만 겨우 남아있는 각도기를 상상해 보았다.
‘흐음 작은 선을 긋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은데...’
지금 쓰는 각도기보다 훨씬 능률적일 것 같았다. 그러나 각도기와 자를 번갈아 쓰는 불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만약 자와 각도기를 합친다면 어떤 모양이 될 수 있을까?’
이리저리 한참을 고민하며 생각해 보았다. 그때, 갑자기 부채 살의 모양이 떠올랐다.
‘아하! 그것을 이용하면 되겠다.’
나는 숙제를 하던 공책에 새로운 각도기의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일단 각도기의 안 부분을 깨끗이 도려내어, 각도기 안의 공간을 활용하여 선을 그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각도기의 중심부분에 얇은 막대를 회전나사로 고정 시켰다. 그 막대는 비어있는 각도기의 안을 이동하면서 자의 역할을 하도록 고안한 것이었다.
그림을 모두 그리고 설명까지 써놓으니 꼭 복잡한 기계의 설계도 같이 보였다.
“흐음 이걸 만들다가 깜빡 잠이 들어 숙제를 못하셨다고?”
선생님은 금테 안경너머로 눈을 번뜩이며 나를 쳐다보셨다.
‘아이고 나는 이제 죽었구나! 어쩌다가 그만 잠이 들었지?’
나는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 떨었다.
“흐음 쓸만하군...”
나는 선생님의 의외의 반응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집에서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말이지? 좋다. 숙제를 대폭 줄여줘야 하겠구나!”
선생님의 폭탄선언에 모두들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다. 호랑이 선생님의 모습이 갑자기 멋있게 보이기 시작했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그림 : 김 민 재(만화가, http : //www.coolmorning.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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