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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공모 당선작
책을 읽기만 하는 백발의 노인
1803년.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겨울바람이 뚫린 창살을 통해 사정없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겨울을 지내기엔 턱없이 허술한 내부구조. 한눈에 극빈자 수용소임을 알아볼 수 있을만큼 더럽고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얇은 모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채 사람들은 바람을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모포 사이로 간신히 내민 얼굴은 하나같이 해골처럼 앙상히 말라 있었다. 그들은 살아있음을 알리려는 듯 퀭한 눈을 가끔 깜박일 뿐이었다.
가장 밑바닥의 극빈의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사람들. 이 틈에서 한 작은 노인이 다른 빛깔을 내며 앉아 있었다.
유난히 말이 없고 묵묵히 책을 읽기만 하는 백발의 노인. 그에게는 왠지 근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듯 했다.
이 노인의 이름은 니콜라스 르블랑. 바로 소다 제조법을 만들어낸 그 장본인이었다.
소다가 무엇이던가? 직물 공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심장 같은 물질이 아니던가.
직물에 색을 입히는 착색작업에 있어 소다는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때문에 소다를 발명한 르블랑은 국가적 영웅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차가왔다.
그의 후반기의 삶은 혁명의 회오라기에 휩싸여 참혹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소다 제조법 현상 공모
1775년 프랑스의 어느 작은 도시. 한가로움이 지배해야할 오후, 여느 때와는 다른 술렁임이 온 도시를 휩싸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 나붙은 안내장들에 사람들이 모여서 한참 시끌시끌했다.
“아,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도대체 글씨를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소다 제조법을 현상 공모 한다는군... 상금이 자그마치 2400프랑이야!”
“소다 제조법? 그게 뭔데?”
“글쎄...”
마을 사람들은 이 알 수 없는 벽보를 보며 서로 시끄럽게 자기주장을 펴고 있었다.
동그랗게 둘러선 사람들 사이로 한 젊은 신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바싹 다려 깨끗한 상의와 큼지막한 갈색의 가방을 들고... 여느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옷차림이었다.
그는 짐짓 흥미가 있다는 듯 엷은 미소까지 띠며 벽보를 읽어내려 갔다.
‘소다 제조법이라... 상금이 무려 2400프랑이나 되다니...’
안경 너머 눈빛을 반짝이며 소다 제조법 공모 문을 읽는 사나이. 바로 그가 니콜라스 르블랑이었다.
프랑스 과학원에서 시작된 소다에 대한 관심은 곧 국민들에게 제조법을 공모하는 일로 이어졌다.
이 공모문은 르블랑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일로 생각되었다. 우연히 부딪힌 이 만남으로 의사였던 르블랑의 삶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선생님! 르블랑 선생님!”
넋을 잃고 있는 르블랑은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조수인 니꼴라이였다.
“아니? 자네가 이곳까지 웬일이야? 병원은 어떻게 하고...”
르블랑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큰일 났어요!”
“큰일?”
“오를레앙 공께서 쓰러지셨답니다. 지금 기별이 왔는데, 급히 좀 와주십사하고...”
“뭐? 오를레앙공이?”
“네...”
오를레앙공은 프랑스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문귀족이었고, 르블랑은 그의 주치의였다.
그런 대 귀족의 주치의가 되는 것은 능력을 인정받는 일로 큰 명예가 뒤따라오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33세의 젊은 의사 르블랑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의 주치의가 된 것은 앞으로 장래를 보장받은 바나 다름없었다.
“어서 서두르지... 마차를 준비하게...”
르블랑은 급히 마차에 올라 오를레앙공의 대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어쩐지 개운치 못했다. 급하게 오를레앙 공에게로 향하면서도 생각은 오직 그 소다제조법 공모 벽보에 쏠려 있었다.
‘소다 제조법이라...’
오를레앙을 위한 진료가 끝난 것은 그날이 거의 다 저문 저녁 무렵이었다.
“위험천만 했어. 만약 그 어른이 일어나지 못했더라면... 휴우”
그는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급한 일이 끝난 후라 그런지 온몸이 나른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자기 낮의 일이 떠올랐다.
‘어째서 소다 제조법을 배우지 못한 국민에게까지 공모한거지? 똑똑하고 유능한 과학자들이 과학원에는 많이 있을 텐데...’
‘혹... 너무 어려워 그들도 실패한건가? 그렇다면...’
‘그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을 내가 하겠다고 나서면 사람들이 비웃겠지? 될 리도 없을 테고... 아니지. 기발한 아이디어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을거야.’
르블랑의 머리 속에 갖가지 일들이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무엇인가 결심이 선듯 주먹을 힘껏 쥐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성공만 한다면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르블랑의 소다와의 싸움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2년 만에 받은 당선통지서
“하하하... 당선됐다. 야호!”
1787년 4월. 르블랑은 자신의 소다 제조법이 당선되었음을 알리는 작은 통지서를 받았다.
그가 연구를 시작한지, 그리고 공고가 난지 만 12년의 시간이 흘렀다.
길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면서 르블랑은 자신이 뛰어든 일에 후회를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걱정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앞서 당선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만이 앞섰다.
이런 열정덕분일까? 르블랑의 아이디어는 다른 출품작을 앞서 당당히 선발되었다.
그가 개발한 소다 제조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소금과 황산을 섞어 굽고, 그 결과 나온 황산소다에서 석회석과 숯을 추출하면 소량의 검은 재가 남았다. 그 검은 재에 물을 가한 후, 구우면 탄산소다를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르블랑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더 큰 욕심과 함께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음... 내 방식이 인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원료의 사용량에 비해 얻어지는 양이 너무 소량이야. 비경제적인 생산방법이야.’
‘좀더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양의 소다를 얻을 수는 없을까?’
그의 지적은 옳았다. 르블랑이 처음 제안한 방법은 원료의 필요량이 너무 많은 데 비해 생산량이 작아 실용화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뒤따랐다. 소다를 충분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좀더 생산량이 높아야 했다.
그는 다시 한번 연구에 착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좋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어. 분명 길이 있을 거야.’
그러나 새로운 소다 제조법을 연구한지 4년여의 시간이 흐르도록, 르블랑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느긋한 성격의 르블랑이었지만, 일이 이쯤 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안되는거지? 정말 길이 없는 것일까?’
그의 초조함은 비단 실패만 거듭하는 실험결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변의 시선도 점차 차갑게만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거야! 아니 뭐가 부족해서 저러는 거야! 프랑스 최고의 권력자인 오를레앙공의 주치의이고... 그만하면 최고의 의사로써의 명성도 있는데...”
“누가 뭐래나?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지나친 욕심쟁이거나...”
“저런 사람은 인술을 펼치는 의사로써의 자격이 없는 인간이야! 그저 욕심뿐이라니까...”
르블랑을 둘러싼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거친 입담은 그를 괴롭혔다. 세상인심이 그를 떠난 때문일까? 그를 찾아오던 환자들의 발걸음도 하나둘 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르블랑은 뜻밖의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르블랑 선생님! 보세요!”
실험실 조수인 디이제가 문을 박차고 뛰어들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과 기쁨으로 한껏 높아져 있었다.
“무슨 일인가?”
르블랑은 조수의 호들갑에 엉겁결에 같이 당황했다.
“뜻밖에도 제가 소다를 만들어냈지 뭡니까. 실험하다가 석회석 가루를 넣었는데 글쎄 소다가 생겼어요.”
“뭐... 뭐라고?”
“예... 저번에 선생님께서 한번 말씀 하셨잖아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석회석 가루에다 숯과 황산소다를 섞어서 가열했더니...”
“정말인가? 그럴 수가. 그래 당장 다시 한번 실험을 해보자고”
르블랑은 디이제가 말한 그대로 다시 한번 실험을 시도했다. 이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지만 그동안 마음이 내키지 않아 미루어 왔던 바로 그 실험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디이제가 말한 그대로 소다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당장 오를레앙공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공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교외의 상도니란 마을에 소다 제조공장을 건설했다. 세계 최초의 대규모 소다 제조공장이었다.
모든 부와 명예가 르블랑의 손아귀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계속되지 않았다. 갑자기 밀어닥친 불운은 그의 목을 죄었고, 결국은 차가운 돌바닥에 그를 내팽겨 쳤다.
혁명 그리고 불행한 최후
그의 불행의 먹구름은 1789년부터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가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을 발견하고 공장을 세우기 2년 전의 일이었다.
프랑스 왕가가 일삼는 사치와 잇따른 전쟁에서의 패배로 프랑스 국민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거운 세금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민들은 급기야 무기를 들고 일어서게 되었고 오랜 시간동안 프랑스를 지배하던 군주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른바 프랑스 혁명이 온 국가를 훑고 지나간 것이다.
분노에 사로잡힌 시민은 손에 쥐어지는 대로 낫과 망치 따위를 들고 자신을 착취하던 귀족에게 몰려가 분노를 터뜨렸다.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던 국왕과 그 가족을 단두대에 올리고 귀족이란 칭호가 붙은 자들은 모두 처참히 죽였다.
이런 피바람은 르블랑에게도 미쳤다. 그는 사실 귀족은 아니었지만 구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오를레앙공의 주치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탄압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그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지 않았던가.
르블랑은 소다공장을 비롯해 그의 전 재산을 혁명 정부에 압수당한 채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그의 공장은 폐쇄되었고, 르블랑 자신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부분은 프랑스가 세계 최초의 소다 제조공장을 갖고도 직물공업이 성장하지 못한 배경이기도 했다.
7년이 흐른 1800년에 르블랑은 정부로부터 공장 운영권을 환수 받고 겨우 귀국을 허락 받았다.
그러나, 이미 절망의 늪에 빠진 그의 삶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일에 열정을 가지고 도저할 건강도 젊음도 없었고, 자본금도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지치고 병들은 늙어 버린 육체와 병든 아내뿐이었다.
결국 1803년 르블랑은 자신의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한 방의 총성과 함께 마감되어진 그의 불행한 삶.
그는 과연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
프랑스 대혁명은 인간의 권리와 평등을 기치로 구세계의 폭정에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혁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르블랑이 겪은 불행과 프랑스가 얻은 손해의 존재도 분명하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새로움에 도전했던 르블랑도 정치적 혁명의 희생양이었다.
어쨌든 르블랑의 소다 제조법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은 크다. 그의 제조법이 영국으로 건너가 그곳의 직물 공업의 밑거름이 되었고 보다 많은 이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이것으로나마 그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까?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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