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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열전
갈망하던 디자인
예배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용했던 교회 안은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로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퀸트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마을 어귀는 예배를 마친 사람들로 어느새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한가한 일요일 오전이었건만 퀸트의 발걸음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의상 디자이너인 그에게 있어 일요일은 한가한 휴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일보다 더 바쁜 날이었다.
주말에는 사람들은 가장 아껴두었던 옷을 입고 한껏 멋을 낸 채로 거리를 활보하기 때문에, 유행이나 사람들의 기호를 알기에 가장 적합한 때였던 것이다. 때문에 퀸트는 일요일이면 간단한 그림도구를 들고 가까운 공원이나 거리로 스케치를 나가곤 했다. 이렇게 얻은 스케치는 그에게 많은 영감과 아이디어의 재료가 되곤 했다.
교회에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공원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퀸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그림 도구를 펼쳤다. 날씨가 화창한 덕분인지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흘렀고, 옷차림도 무척 화사했다. 그러나 왠지 퀸트의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기만 했다.
‘좀더 시선을 확 사로잡는 옷은 없나?’
그는 연필을 놓은채 주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려한 레이스에 울긋불긋한 장식 꽃, 봄꽃을 연상시키는 밝은 색조...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옷들이 넘실거렸지만, 퀸트의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옷이 돋보인들 무슨 소용이야? 옷을 입는 건 사람인데... 사람보다는 옷이 먼저 눈에 들어오니....’
‘여성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옷은 없을까?’
퀸트는 텅 빈 화폭을 펼쳐놓은 채 망연히 어지러운 공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갈망하던 디자인
눈부신 조명 아래 가벼운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관람석을 가로지르는 무대 위에선 현란한 의상을 걸친 모델들이 저마다의 맵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공작 깃털로 장식한 벨벳 드레스, 구름위에 떠있는 듯 가볍게 돌아가는 플레어 스커트, 장정 둘은 너끈히 파묻어 버릴 만큼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쉴새 없이 지나갔다. 모델들은 때로는 귀부인 같은 우아한 미소로, 때로는 개구쟁이 소녀 같은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붙잡았다.
무대의 열기만큼 관람석도 열광의 도가니였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지고,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진동했다. 어떤 이들은 열심히 연필을 놀리기도 하고, 심각한 얼굴로 귓속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이 흥분한 관람객중에는 퀸트와 그녀의 친구 다이안도 끼어있었다.
“메리, 굉장하지 않니? 진짜 뛰어난 감각이야. 특히 중국풍을 가미한 디자인은 신선하기까지 해.”
다이안의 얼굴은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 올라있었다. 그녀는 잠시도 무대위에서 시선을 옮기지 못하겠다는 듯, 퀸트의 어깨를 토닥이며 동의를 구했다.
“정말 굉장해. 정말이지....”
메리 퀸트 역시 넋이 나간 듯 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만큼 패션쇼는 충격적이었다. 다이안의 고집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나선 자리였는데, 정말 상상이상의 체험을 하고 있었다.
특히 옆선을 과감하게 트고, 여성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낸 중국풍 드레스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아한 여성의 곡선을 멋들어지게 살려주면서, 걸을 때마다 살짝 다리가 드러나도록 한 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디자인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아주 멋져. 신선한 충격이야!’
내내 그녀를 괴롭혀 왔던 갈증과 허전함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일요일 공원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한 감동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갈망하던 디자인의 실마리를 잡은 것만 같았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릴 수 있는 디자인. 작업실로 돌아가는 퀸트의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신이 허락한 여성의 아름다움
패션쇼에서 접한 감동은 열병처럼 그녀를 들뜨게 했다. 그녀는 한동안 흥분한 채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했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패션쇼 이전의 기억은 모두 잊은 듯, 오로지 쇼를 통해서 보았던 아름다운 실루엣을 되뇌이고 되뇌였다. 거리의 아름다움이나, 일요일이면 거리를 물들이는 색색의 현란한 의상도 안중에 없는 듯 했다. 그녀는 패션쇼를 보고 스케치한 자료들을 보고 또 보았다. 특히 중국풍의 아름다운 드레스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곡선이야. 나무랄 곳이 없어....’
당시의 치렁치렁한 스커트에 비하면 중국풍 드레스는 정말 산뜻한 디자인이었다. 화려한 레이스나 과장된 꽃장식이 없어도 드레스는 충분히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아니 오히려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까지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정말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곡선을 살린다. 이것도 여성의 곡선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낸 것이겠지?’
퀸트는 이전까지 유행했던 옷들을 떠올려 보았다. 허리를 졸라 메고 가슴과 히프를 지나치게 강조한 스타일, 어깨를 딱딱하게 표현하고 허리와 엉덩이 다리 선을 감추듯 두리 뭉실하게 감싼 스커트 등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동안 너무 옷 자체의 아름다움에만 신경 썼는지도 몰라.’
당시의 옷은 옷 자체는 훌륭할지 모르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여성의 아름다움은 겹겹이 싸인 화려한 천속에 파묻혔다.
‘여성의 몸매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스커트를 디자인 해보자. 여성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옷을 말이야.’
새로운 창조의 기쁨
그동안 진부한 디자인에 싫증이 나있던 퀸트는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기쁨에 쉬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다. 이번 연구는 그녀에게 있어 일종의 도전이었다. 구태의연한 발상에 의존했던 기존의 디자인을 무시하고 전혀 색다른 디자인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그 핵심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돋보이게 하자는 것이었다.
기존의 옷들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감추는데 급급해 있었다. 전통이니 규범이니 하는 틀로 여성을 억압하고, 거추장스런 의상으로 아름다움을 감추게 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우아함이니 순결이니 하는 말들로 치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들은 여성 자신의 의지보다는 사회의 편견에 따라 옷 입기를 강요당했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퀸트는 달랐다. 그녀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외적인 아름다움도 함께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이아원석과 같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패션이라는 세공기술로 더 아름답게 다듬어야 한다는 것이 퀸트의 생각이었다.
연구는 계속되었고 퀸트의 작업실은 수천 장의 디자인 스케치로 가득했다. 쓰레기통에는 구겨진 스케치로 넘치고 있었다.
‘여성의 매력이라고 하면 아름다운 목선, 풍만한 가슴, 허리에서 엉덩이 그리고 다리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이지....’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디자인으로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성의 곡선을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재단하고, 탄력 있는 소재의 옷감을 사용해 몸에 타이트하게 붙도록 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퀸트는 부푼 기대를 안고 시판에 들어갔다.
절반의 성공
그러나 퀸트의 새 디자인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분명 그녀의 발상 자체는 당시 여성들의 욕구에 부흥한 것이었지만 문제점도 많이 안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새 디자인의 옷은 움직임이 불편했다. 몸매를 살리는데 치중한 나머지 활동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까닭이었다. 옷을 입은 여성은 치마의 통이 너무 좁은 탓에 종종걸음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부담 없이 입기에는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탄력 있는 소재의 옷감이 비쌌기 때문이었다. 퀸트에게 있어 이번 시도는 절반의 성공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민에 휩싸였다.
‘확실히 편하게 입기엔 부담스러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물론 큰 성공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새로운 시도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입어주지 않은 옷은 진정한 옷이라고 할 수 없지. 그저 장식품일뿐....’
퀸트는 자신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데 소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실용성을 뒷전에 두고 만 것이다. 그 결과 너무 실용성이 떨어지는 형이상학적인 디자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새롭게 시작해보자. 이번에는 실용성을 바탕으로 만드는 거야.’
충격은 컸지만 지금까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포기한다면 자신의 꿈은 저만치 멀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과의 새로운 싸움에 도전하기로 했다.
새로운 연구는 우선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실용성의 시작은 소비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부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중단했던 공원에서의 스케치도 다시 시작하였다. 물론 이번에는 스케치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스케치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 역시 옷을 사 입는 소비자의 입장에 서보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이지... 하지만 실용성을 꼼꼼히 따지는 것도 역시 여성이야....’
‘아름다우면서 실용적인 디자인을 만들어야 해.’
고민은 계속되었지만,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얽혀가는 문제들로 퀸트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퀸트는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디자인해온 옷들을 찬찬히 살피며 자기를 반성해보았다. 모두 시선을 자극하는 유려한 곡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 내가 너무 한편만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참동안 옷을 바라보던 퀸트는 자신의 디자인이 왠지 어색하게만 보였다. 아름다운 여성의 곡선을 그대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또한 여성의 곡선을 감추는 옷이었던 것이다.
‘왠지 부자연스러워....’
옷을 이리저리 펼쳐보던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긴장감이 서렸다.
‘그래! 옷으로 감쌀 필요는 없어. 그대로 보여주는 거야!’
그녀는 갑자기 가위를 들고 옷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나서 자꾸만 가위를 놀렸다.
이윽고 거울 앞에 선 퀸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릎 위로 한참을 올라간 스커트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도발적인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이거야! 시선을 사로잡는... 오싹하리만큼 짧은 치마. 아름다운 곡선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거야.’
패션계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 - 미니스커트
퀸트는 곧장 자신의 작품을 시중에 내놓았다. 그녀로썬 일종의 모험이었다. 미니스커트는 시판되자마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악마적 발상이라며 혹평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스커트를 불태워버리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만큼 인기도 높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퀸트의 미니스커트는 가히 폭발적으로 팔려나갔다. 아름답고자하는 여성의 욕망이 짧은 스커트로 불타오른 것이다.
퀸트의 미니스커트는 서서히 세계 패션계의 태풍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영국시장을 점령하더니 전 세계 디자인계의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그 열풍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 까지 미칠 정도였다.
보수파의 압력으로 퀸트를 터부시하던 영국정부도 마침내 두 손을 들게 되었다. 그때 1966년 한해에만 퀸트가 수출로 벌어들인 돈만 해도 4백만 파운드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정부는 수출에 공헌이 큰 그녀를 인정하고 마침내 훈장을 수여하기에 이르렀다.
구태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그녀의 용기가 가져다준 결과였다.
그리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니스커트는 세계 여성의 사랑을 받는 사라지지 않는 유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그림 : 김 민 재(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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