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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빛
요주의 교통사고
진성이는 선비처럼 착실하고 공부를 잘하여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는 모범생이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별명은 선비였다.
그러던 진성이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야, 진성아! 공부가 지겹지도 않니? 오늘 저녁에 ㅅ여고 여학생들과 미팅이 있는데 함께 가지 않을래?”
맨 처음 진성이에게 유혹이 다가온 것은 사춘기를 맞아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을 때였다.
평소에도 가끔 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으로, 비디오방으로, 오락실로 전전하던 한철이가 진성이에게 이렇게 말을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진성이의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나도 끼워 주겠니?”
“모범생께서도 여학생은 구미가 당기나 봐?”
지나가는 말로 던져놓고도 진성이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의외라는 듯 한철이는 느물느물 빈정거렸다.
“까불지 말고 말을 꺼냈으면 끝을 맺어야지. 몇 시에 어디야?”
“어라? 진짜네. 너 정말 후회하지 않는 거지?”
“글쎄 그렇다니까! 어디로 가면 되는 거냐고?”
그렇게 해서 진성이는 그날 밤, ㅅ여고 은영이를 만나게 되었다.
은영이는 얼굴이 예쁘고, 마음은 착했지만 가정환경이 좋지 못하여 늘 밖으로만 도는 여학생이었다.
진성이와 은영이는 몇 개월이 안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야, 진성아! 너 의외로 순진하구나. 남자는 공부만이 전부가 아니야. 모범생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무렴 남자가 오토바이도 못타니? 바보!”
은영이가 무심코 내뱉은 이 한마디는 진성이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고, 그때부터 진성이는 아빠를 졸랐다.
“아빠! 저도 오토바이사주세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은 우리 반엔 저 밖에 없어요.”
“뭐? 오토바이라고? 안돼!”
한마디로 거절한 것은 진성이의 엄마였다. 그러나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처럼 결국 진성이 부모는 진성이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조심해야 된다.”
오토바이를 처음 타던 날, 진성이는 하늘을 날 것처럼 즐거웠다.
‘기집 애, 나 보고 순진하다고? 남자 자존심이 어떤 건지 보여주지!’
그날 이후 진성이와 은영이는 더욱 자주 만나게 되었고, 만날 때마다 그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까운 곳을 천천히 오가던 그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통이 커지고, 서로에게 흥미를 잃어갈수록 그들은 단순히 속도감을 즐기기 위해 속력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둘 사이가 완만할 때는 별 탈이 없었다.
진성이의 성적이 눈에 띄게 떨어지게 된 것은 은영이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서부터였다.
“은영아! 너 또 다른 남자친구 생겼니?”
“아니, 이젠 너를 만나도 재미가 없어서! 그 뿐이야.”
“그래도 그 동안 나눈 우리의 사랑은 어떡하고?”
“사랑? 사랑 좋아하네. 이 맹추야, 그럼 나하고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었니?”
“그럼 아니었단 말이야?”
“겨우 고등학생 주제에 웬 사랑타령을 다 하고... 나 참!”
그날 밤, 진성이는 은영이와 헤어진 후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혼자서 처음으로 마셨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 나쁜 기집 애!”
어두운 밤길을 사정없이 달리는 그의 앞으로 자동차의 불빛이 스쳐갔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의 불빛이 그의 시야를 가렸고, 진성이는 도로의 난간을 들이받으며 쓰러졌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지만 눈과 이마의 깊은 상처는 진성이에게 치명적인 상흔을 남겨 놓았다.
“아앗, 앞이 안 보여!”
때늦은 후회를 해보았지만, 그 사고로 진성이는 시력을 잃고 말았다.
필자의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이다.
어둠뿐인 세상에서
“내가 맹인이 되다니! 공부는 어떻게 하고, 대학은 어떻게 가지? 차라리 날 죽게 해줘요.”
진성이는 눈을 뜨나 감으나 어둠뿐인 세상에서 절망으로 몸부림을 쳤다.
“안돼, 이건 아냐! 하늘이 보고 싶어. 파란 하늘...”
인간에게 시련이란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한 존재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이 시련이 인생을 더욱 값있게 빛나게 할 수도 있다.
최초의 실용적인 점자를 만들어낸 루이 브레일의 인생이 그러했다.
루이 브레일.
그의 세계에는 색깔이 없었다. 아니, 형체도 없었다. 찬란한 정오의 햇빛도, 한 밤의 신비한 별빛도, 달빛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어둠,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앉아서 봐도, 일어나서 봐도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아까부터 멍하니 앉아있구나.”
기척 없이 다가서는 목소리에 루이는 화들짝 놀랐다.
“아, 선생님! 이것저것 생각을 좀 하다 보니...”
루이의 나이 많으신 선생님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제자의 손에 들려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그래, 요즘은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구나. 그래 책은 재미있니?”
루이의 손에 들린 책은 맹인들을 위해 고안된 돋을새김의 책이었다.
바렌틴 호이가 만든 책이었으나, 그것은 점자를 종이에 돋을새김하는 것뿐이었으므로 별 효용성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 방식으로는 맹인이 글자를 기록할 방법이 전혀 없었던 때였다.
“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제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껴요. 좀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데...”
루이의 고통 섞인 목소리에 선생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맹인들의 절망감과 한이 그대로 전달되어져왔기 때문이다.
“그렇겠구나.”
루이의 마음은 너무나 무겁고 착잡하기만 했다.
자신의 스승과 같은 사람들이 맹인들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혜택을 입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가슴이 아파서 못 견디겠어요.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어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원통하고 속상한데 그나마 저처럼 혜택을 입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니...”
“그렇단다. 그나마 다행으로 알아야지. 어떻게 하겠니.”
게다가 얼마 전에 전해들은 맹인들의 생활상으로 인하여 그는 스스로를 더욱더 자책하고 있었다.
‘정말 맹인들은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것일까? 수용소에 단체로 수용되어 바구니나 만들면서 근근이 살아가야 한다니...’
묵직한 점자책을 들고 있는 루이의 손이 점점 떨려왔다.
‘맹인도 배워야 하는데... 배울 방법이 없으니 억울해! 너무 억울해.’
안으로 절규하며 루이는 피가 배어나오도록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의 어둠의 세계는 깊은 절망까지 곁들여 더욱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둠, 어둠뿐이야! 암흑뿐이라고.’
전쟁터의 암호
덧없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이는 한 장의 이상야릇한 종이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작은 요철이 규칙적으로 돌출되어 있는 것으로, 그의 민감한 촉각을 예민하게 반응시켰다.
“응? 이건 뭐지?”
루이는 그 종이를 건네준 사람의 소매를 잡아 끌어당기며 필사적으로 물었다.
“밤 쓰기라는 것이지.”
“밤 쓰기라고요? 그게 뭔데요?”
“전쟁터에서 밤에 급한 전령을 보낼 때 쓰는 암호 같은 것이야.”
“전쟁터? 암호?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알았어. 전쟁터에서는 밤에도 불을 켤 수가 없겠지? 적에게 금방 노출이 될 테니까.”
“네. 맞아요.”
“그러니까 작은 요철로 암호를 새기는 거야. 손으로 더듬어서 알아 볼 수 있도록...”
그 순간 루이의 굳게 닫힌 눈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아아, 바로 그거야! 문자를 기호로 나타내는 거야.”
“문자를 기호로 나타낸다고? 어떻게? 루이, 좀더 자세히 말해봐!”
“A는 동그라미 하나, B는 동그라미 두개... 이런 식으로! 우리도 암호를 만들면 된다고!”
루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됐어, 됐어! 이제 우리 맹인들도 읽고, 쓸 수 있게 될 거야!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고전을 읽고, 편지도 쓰고, 철학을 공부하고...”
루이의 기쁨에 넘치는 외침은 전 세계 맹인들의 환호성으로 이어질듯 했다.
알파벳 기호를 만들다
루이는 그때부터 곧바로 6개의 점철을 기본으로 하는 알파벳 기호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알파벳 기호는 완성이야. 이젠 시험적으로 사용해 봐야지.’
그리고 그는 자신이 속해있는 국립 맹아학교에서 기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지시 계통이 있는 2개의 금속판 사이에 끼운 점철종이를 펜촉으로 찍어 올려 기록하는 방식을 고안하였다.
“자, 이렇게 점철종이를 펜촉으로 찍어 올리면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우리의 생각을 쓸 수 있게 되었군요.”
그러나 그의 점자 방식은 그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극히 일부에게만 알려졌다.
아마도 맹인 사회의 폐쇄성과, 사회의 무관심이 루이 브레일의 기호를 세상에 알리는 것을 막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때요. 나의 점자가 우리 맹아학교에서는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콜록 콜록 흐 으음...”
“네, 브레일! 학생들에게 정상인들처럼 책을 읽게 하고, 편지를 쓰고, 공부를 할 수 있게 했으니 정말 큰일을 하신 겁니다.”
“그렇습니까? 쿨럭 쿨럭 크 흐음...”
브레일은 결핵에 걸려 파란 많은 그의 생애를 마치게 되었지만, 그때까지도 점자가 정식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에 이르러서야 루이의 기호는 국제회의에서 표준으로 합의되었다.
“우리 국제회의에서는 루이 브레일의 기호를 맹인들의 점자 표준으로 삼을 것을 합의합니다.”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어쨌든 암흑의 세계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이 마련된 셈이었다.
“이제 서야 겨우 빛을 보다니, 너무나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맹인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빛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점자는 맹인들에게 기념비적인 고안입니다. 루이 브레일은 가고 없지만, 그의 뜻은 맹인들에게 영원한 빛이 될 것입니다.”
맹인으로서 자신의 불행에 묻혀 일생을 허비해 버리지 않고, 이를 극복하여 오히려 남을 위한 훌륭한 업적을 이룬 루이 브레일의 고귀한 정신은 오늘날 이기적이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역경을 기회로 삼아라
“진성아, 루이 브레일의 이야기를 듣고도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아니요...”
진성이는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란다. 물론 진성이의 충격이 크겠지만, 심기일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브레일의 점자를 배워 이제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 어떻겠니?”
“노력해 보겠습니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툭하면 자살, 혹은 가출 등이 이어지고 있는데 인생이란 반드시 어둡고 괴로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란다. 한번 뿐인 삶을 어떻게 하면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 아닐까? 진성이가 시력은 잃었지만 두 손과, 양 다리와 그 외 신체의 모든 부분이 건강하니, 이것 또한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다친 쪽만 생각하다보니 성한 쪽은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이제부터는 건강한 부분만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눈 뜨고는 못 볼 일들이 많은데, 나쁜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일부러 감았다고 생각하고, 태연하게 살아보는 것이 어떨까? 어때, 멋있잖아? 진성아!”
“......”
진성이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건강한 몸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만일 어려움과 시련이 닥쳐왔다면 루이 브레일처럼 무언가 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도전해 보자.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온다. 반드시!
그리고 진성이처럼 인생의 황금기를 쓸데없는 일로 낭비하지 말자. 만일 진성이가 한철이의 유혹을 끝까지 뿌리쳤더라면 다가오지 않을 불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맹인이 되었든, 소아마비 환자가 되었든, 날 때부터 불구자일 수도 있지만 잘 지내다가 불행을 만나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어렵고 불행한 때일수록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자.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그림 : 김 민 재(만화가, http : //www.coolmorning.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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