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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가 대통령
시급한 아세톤 확보
제1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을 무렵, 전쟁의 격전지인 유럽 대륙은 황폐함 그 자체였다.
오래 이어지는 전쟁으로 국민의 생활은 물론이고 군수물자의 부족으로 군대의 사기 또한 나날이 떨어지기만 했다. 이런 현상은 부국이자 유럽의 강대국인 영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사령관 각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세톤의 확보는 이만저만 시급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이번 전쟁의 승패가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주십시오”
보고를 하는 부관의 목소리에는 결의마저 엿보였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사령관의 재가를 받아내고 말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다져먹은 터였다.
“그래.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네만 적이 모든 해상통로를 장악하고 있는 데야...”
전쟁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사령관으로 썬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아세톤은 나무나 풀에 들어있는 성분으로 무색의 휘발성 물질, 여러 가지 물질을 쉽게 녹이는 성질을 갖고 있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여성들의 화장도구 중의 하나인 메니큐어를 지우는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공업측면에서 보면 그 쓰임새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1차대전을 치루는 당시에는 그 중요도가 더욱 컸다. 탄환에 쓰이는 폭약, 코르다이트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성분이기 때문.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세톤은 거의 대부분 나무로부터 얻어내었다. 목재를 공기가 드나들지 못하는 밀폐그릇에 넣고, 끓여서 여기에 나오는 증기를 모으는 방법을 사용했다. 아세톤은 바로 이 증기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간단한 과정을 거쳐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나무만 풍만하다면 아세톤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의 고민은 바로 나무의 양에 있었다. 삼림이 거의 사라져 아세톤 제조에 필요한 나무를 외국으로부터 들여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전에는 선박에 나무를 실어 나르는 방법으로 필요한 아세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이것이 그리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적대국이 목재를 실은 영국 배들에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영국으로 들어오는 목재의 양은 계속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탄환 생산에 필요한 아세톤도 절대 부족해졌다. 이것은 영국으로써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설상가상으로 목재에서 얻은 아세톤으로 만든 포탄은 성능 면에서도 뒤떨어지는 듯 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것이 목재로부터 얻은 아세톤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포클랜드 해협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포탄이 상대방의 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탓에 쓰라린 패배를 당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좋아. 나무를 확보하기위해서는 할 수 없지. 수송선에 병력을 더 지원하도록 하게”
사령관은 결심한 듯 병력의 재편성을 지시했다. 전투가 치열한 와중에 한 명의 병사라도 후방으로 돌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아세톤의 확보가 너무 급박한 탓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1퍼센트의 가능성에도 도전
사령관의 지시에 부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결단으로 한동안은 아세톤의 수급이 원활하게 진행될 것이었다.
그 순간 사령관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이 전쟁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목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 큰 것들을 배로 날라 오는 것도 한계가 있어. 다른 방법을 고안해보자고.”
“무슨 말씀이신지?”
부관은 사령관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지난번 수뇌부 회의 때 나왔던 이야기 말이야.”
“아세톤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해.”
“아...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쉽게 이루어질까요?”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으면 모험을 걸어볼 밖에. 우리나라엔 실력 있는 과학자들이 많으니, 분명히 해낼 수 있어.”
그제 서야 부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어떤 과학자가 아세톤의 제조방법이라며 보고를 올렸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아, 바이츠만이라고 했던가요. 그 열렬한 유태주의 과학자 말씀이시군요. 안 그래도 그의 제안을 검토해야한다는 의견이 올라와 있던 참이었습니다.”
부관과 사령관은 동시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육군성은 전국의 과학자들을 상대로, 군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술을 보고하라고 요청했다. 이때 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전략적 가치를 만들어 내었다. 백 러시아 태생의 유태인 과학자 카임 바이츠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설탕에서 아세톤을 추출하는 제조법을 개발, 육군성에 보고했다.
사실 바이츠만은 아세톤의 제조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당시 맨체스터 대학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고, 오로지 인조고무의 제조에 관심을 가지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효모대신 박테리아 이용
1910년 그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일단은 이소아밀알코올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군.’
바이츠만은 흡족한 미소를 띠고 플라스크를 흔들었다.
이소아밀알코올은 그의 인조고무 연구에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어 여간 골치 거리가 아니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인조고무 연구에는 적어도 지금 확보한 양의 백여 곱 이상의 이소아밀알코올이 있어야 했다.
바이츠만은 필요한 만큼의 이소아밀알코올을 설탕으로부터 얻어낼 작정이었다. 효모를 사용해서 설탕을 발효시키면 소량의 이소아밀알코올이 생긴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에 착안한 것이다.
그는 보다 많은 이소아밀알코올을 얻기 위해 효모대신 박테리아를 이용해서 설탕을 가공했고, 마침내 이소아밀알코올과 비슷한 냄새를 가진 액체를 얻어낸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그 액체가 과연 이소아밀알코올인가를 확인하는 일뿐이었다. 만약 생각대로라면 그의 일조고무 연구는 한층 앞서갈 것이었다.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액체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이럴 수가 이소아밀알코올이 아니잖아!”
그의 목소리는 실망을 넘어 노기마저 띠고 있었다. 이소아밀이라 믿었던 액체는 부틸알코올과 아세톤이 섞인, 적어도 바이츠만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였다.
바이츠만은 멍청하게 주저앉아 버렸다. 이소아밀을 얻기 위해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휴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군. 이제 이소아밀을 어디서 얻는다?’
그는 멍하니 어지럽혀진 실험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이소아밀이라고 믿었던 액체가 거기 동그라니 놓여 있었다.
“아!”
갑자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서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부틸알코올과 아세톤이라... 이소아밀을 얻는데 실패하긴 했지만 새로운 성과를 거둔 셈이군.’
엉뚱한 성공이 새삼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새로운 추출법을 발견한 셈이었다.
‘완전 실패는 아니니 낙담할 필요는 없겠군. 힘을 내서 다시 한번 시작해보자’
조금 전까지의 좌절을 잊은 듯, 그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엉뚱한 성공을 머리 속에 간직한 채.
너무 긴박한 상황
1916년 육군 성 회의실. 묘한 긴장감이 방안을 옥죄고 있었다. 이는 시시각각 전장에서 보고 되는 긴박한 전투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당시 군수풍위원회 위원장 로이드조지와 바이츠만이 앉아 있었다. 침묵이 모든 것을 삼킬 듯 묵직하게 흘렀다.
고요를 깨뜨린 것은 로이드였다.
“어때요? 하실 수 있겠습니까?”
바이츠만은 한참을 망설였다.
녹말을 설탕으로 변화시키고 여기에 박테리아 처리과정을 거쳐 아세톤을 추출하는 방법은 이미 오래전에 완성해 두었었다. 지도교수가 쓸모없는 부산물은 하수구에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충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세톤 제조법을 완벽하게 정리해 두었다. 박테리아를 언제 얼마큼 투입하고, 온도는 어느 정도 맞추어야 하는지 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론대로라면 얼마든지 아세톤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아세톤 제조법은 잘 알고 있습니다. 녹말을 박테리아로 처리하면 부틸알코올, 에틸알코올이 섞인 액체를 얻지요. 이중 약 30퍼센트가 순수한 아세톤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이지요. 그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이츠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단시일에 아세톤을 대량생산하라는 로이드의 요구는 터무니없어 보였다.
“제가 지금까지 얻어낸 아세톤은 겨우 한 컵에 불과하다고요.”
“잘 압니다. 실험실의 결과를 바로 대규모 생산 공정으로 연결하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을 방법도 당신의 것뿐이고요. 길이 없어요.”
바이츠만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른 아세톤 제조법이 없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좋습니다. 해보죠. 시간을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내일이 없을 런지도 모릅니다.”
로이드의 굳은 얼굴. 바이츠만은 전쟁 상황이 영국에 결코 유리하지 않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을 낮 삼아 매달려 보겠습니다. 일단 최선을 다해봅시다”
선잠에서 조차 연구
바이츠만이 아세톤 제조를 위해 선택한 곳은 브롬리 바이 바우에 있는 위스키 증류공장. 새로이 제조설비를 갖추기보다 술을 만들어내는 증류기와 발효시설을 이용하면 보다 빠른 시일 안에 결과를 얻으리란 계산에 따른 선택이었다.
작업의 처음은 밀, 보리, 귀리, 옥수수, 감자 등 녹말을 풍부히 포함하고 있는 농산물들의 확보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세톤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설탕은 미국의 사탕수수 농장이나 유럽의 사탕 무밭으로부터 수입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남은 방법은 녹말에서 설탕과 유사한 당을 추출해서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아니야. 이 정도의 양으론 어림도 없어. 밀로 바꾸어 보자고.”
그는 닥치는 대로 곡물을 빻고, 당을 추출하고 증류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감자며 귀리며 온갖 곡식에 매달렸지만 만족할만한 결과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발효시간이 너무 길었어.”
“이런, 박테리아의 활동이 왜 이리 더딘 거지? 온도가 적당치 않은 걸까?”
역시 아세톤의 대량 생산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험실에선 간단히 해결되던 사소한 문제가 커다란 골치 거리가 되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어쩌다 이룬 선잠에서 조차 연구에 몰두하는 꿈으로 시달릴 정도였다.
“박사님! 박사님!”
온갖 서류더미가 흩어진 책상에서 앉은 채로 맞은 아침이었다. 옥수수를 이용한 방법이 결과를 맞을 때쯤이었으므로 바이츠만의 신경은 잔뜩 당겨놓은 바이올린의 현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어서오세요. 엄청납니다. 엄청나요”
흐트러진 모습으로 마구 흥분한 채 문을 열어젖히는 연구원의 흥분된 몸짓에, 바이츠만은 승리를 예감한 듯 슬며시 눈을 감았다. 긴장이 일순간에 풀리면서 한바탕 격전을 치른 병사처럼 노곤함이 밀려왔다.
“그래 얼마나 되던가?”
“반 톤입니다. 한꺼번에 반 톤의 아세톤이 나왔단 말입니다.”
연구원은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다시피 했다. 지금까지의 고생을 모두 잊은 듯 상기된 모습이었다.
“반 톤이라... 하하하”
커다란 웃음소리가 방안을 휘저었다. 승리의 웃음이었다.
드디어 대성공
옥수수를 이용한 아세톤 제조법은 대성공이었다. 영국은 서둘러서 증류공장을 확보하고, 새로운 생산 공장을 세우는 등 아세톤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이 무렵 아세톤을 만들기 위해 소비하는 옥수수는 1년에 무려 50만 톤에 달하게 되었다.
옥수수는 미국으로부터 대부분 수입되었으나, 부피가 작아 목재를 실어 나를 때에 비하면 훨씬 효율적이었다. 공장에서는 늘 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싸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보였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작용하기 마련. 독일의 막강한 해군력은 영국국적의 선박에 무차별적인 포격을 감행, 결국 옥수수를 실어 나르는 데에도 한계에 달하게 되었다. 당장 영국은 옥수수를 대신할 새로운 녹말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먹을 것이 귀한 전쟁 통에 곡물을 확보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밤은 당으로 바꾸기도 쉽습니다. 밤을 모아주세요”
궁여지책으로 옥수수를 대신해 밤을 이용하기도 한 영국정부는 국민을 대상으로 홍보 활동을 폈다. 산에 흩어진 밤을 모으면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영국정부는 곡물이 풍부한 캐나다와 미국, 인도에 아세톤 공장을 건설키로 하고, 한편으로 국내에서 밤 줍기 운동을 펴 난관을 헤치고자 했다.
밤 줍기 운동에는 나이어린 소년들이 동원되었다. 뛰어놀기 좋아할 어린 소년들이 군말 없이 밤 줍기에 나서는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한 무리의 소년들이 긴 장대를 들고 숲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보며 바이츠만은 눈시울을 적셨다.
‘나의 아들과 손자에게도 사랑할 조국이 있다면...’
나라 없는 민족으로 떠도는 유태인들의 처지가 새삼 떠올라 가슴을 적셨다.
먼 조상대에 번성하며 살았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땀, 팔레스타인, 언젠가는 돌아가리라는 희망만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오던 터였다. 아버지에게 또 그의 아버지에게 전설처럼 들어오던 그 조국.
바이츠만은 눈물을 삼켰다.
‘이렇게 계속 방랑하듯 살아가야 하는가? 이제 나의 아들들에게 조국을 찾아주어야 하지 않은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국의 재건을 위해 일 하리라 각오했다.
이스라엘 건국의 첫걸음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세톤의 생산이 본격화될 무렵 바이츠만은 당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강력한 수상후보로 거론되던 로이드조지를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국가는 당신의 노고에 충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국왕폐하께서 직접 훈장을 하사하시도록 건의할 생각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실지 모르겠지만...”
바이츠만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양하겠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내리시는 훈장은 다시없을 명예인데요.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저 개인에게 주어지는 영예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런 흥미가 없습니다.”
“아... 그렇다면 영국정부가 당신을 위해 무엇 해드릴 일이 없겠습니까? 특별한 요구라도 있으신지요?”
로이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바이츠만은 낮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조국의 건설을 위해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우리의 옛 땅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싶습니다.”
로이드는 바이츠만의 완고한 태도에 놀라 잠시 동안 말을 잊은 듯 했다. 적막이 흘렀다.
“아, 당신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또한 당신의 조국애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장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군요. 하지만 언젠가 당신의 힘이 되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로이드는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바이츠만의 양 손을 굳게 잡았다. 이것이 유태인의 새로운 조국, 이스라엘 건국의 첫걸음이었다.
이후 로이드는 바이츠만과의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당시 외무부장관 밸푸어와 여러 차례 접촉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태민족에게 양도하는 과정을 심도 깊게 논의 했다. 그리고 영국 수상의 자리에 오른 로이드는 1917년 세계의 역사를 뒤바꿀 하나의 선언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태민족의 조국을 건설하는 것에 호의를 보내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선언문이 발표되고 얼마 후 연합군은 모두 이 선언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이제 유태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은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터키군의 통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을 영국군 사령관 엘렘비가 점령하면서 모든 것이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발명가에서 대통령으로
“이제야 모든 것이 이루어 졌구나.”
영국정부의 유태인위원회의 위원장 자격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밟은 바이츠만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꿈으로 그리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모든 것이 급하게 진행되었다. 1920년까지 수천 명에 달하는 유태인이 새로운 조국으로 찾아들었다. 이와 함께 토지가 개간되었으며 학교가 세워지고 공업이 시작되었
다. 바야흐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팔레스타인에 유태민족의 독립국가 이스라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이츠만은 이 자랑스러운 조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그 이름을 더욱 빛냈다. 어쩌면 이는 그가 조국 건설을 위해 바친 노력의 결실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스라엘의 건국이 바이츠만 한 사람의 힘으로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영국 수상인 로이드가 친 유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을 뿐더러, 각계 각층에 자리 잡고 있던 유태세력의 힘이 하나로 결집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과학자가 이룬 업적이 1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크게 바꾸었음은 물론이고, 유태민족국가 건설에 이바지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그림 : 김 민 재(만화가, http : //www.coolmorning.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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