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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에 소개된 모든 글의 저작권은 저자인 왕연중 선생님(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wangyj39@dreamwiz.com)에게 있습니다.
저자의 허락없이 무단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제목 : 6월이면 생각나는 발명품      

  6월이면 생각나는 발명품

1950년 6월 25일. 기억조차 하기 싫은 6.25 전쟁. 우리 민족으로는 가장 큰 전쟁이었고, 가장 비극이었다. 역사를 가정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이 전쟁만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크게 발전했을 것이고, 이미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되어 이산가족의 아픔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크든 작든 전쟁의 연속이었고,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무기가 발명되기도 했다. 우리 민족도 예전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무기를 발명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에는 첨단무기를 선보이지 못했다. 20세기 이후 첨단무기는 선진국들의 독무대였다.
6.25 전쟁 74주년을 맞아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면서 무기 발명역사 여행을 떠나 본다.

 세계 최초이자 최고의 철갑선 군함인 ‘거북선’
우리나라의 고대 무기 중에서 세계 최초이자 세계 최고로 외국에서도 인정받는 것 은 거북선과 화차 신기전이다. 거북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 군함이고, 화차 신기전은 세계 최초의 다연장로켓으로 이미 국제적으로 공인된 바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거북선하면 이순신 장군과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생각한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친 거북선의 발명가이고, 정주영 회장은 1971년 공장도 없이 울산 미포만 지도 한 장을 들고 영국으로 달려가 A&P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에게 5백 원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민족은 영국보다 300여년 앞선 1592년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만들었다.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라고 설득하여 차관을 받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비노스도 같은 방법으로 설득하여 26만 톤짜리 배 두 척을 주문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세계 제1의 조선국가로 성장하게 된 근간이 된 것이다.
사실은 거북선은 이순신이 처음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 기존의 거북선을 이순신 장군이 당시 상황에 맞게 크게 개선 발명하여 휘하의 군관이었던 나대용에게 제작하도록 한 것이다. 사실은 이것도 필자의 의견으로, 학자에 따라 다른 주장을 펴기도 한다.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여기에 1413년 한강에서 거북선과 가상 왜선이 해전 시범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200여 년이 지나 1592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2월 8일 자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이순신장군의 거북선은 외형은 전면에 용머리가 있다. 좌·우측에는 각각 6문의 포가 설치되어 있다. 상판 덮개에는 十자형의 길이 나있고 내부 구조는 2~3층으로 되어 있다. 배 밑과 갑판 위 부분으로 나누어져 1층에는 창고 및 선실 등이 있다. 갑판 위 2층에는 선장실을 비롯하여 노군과 전투원의 활동공간이 있다. 거북선에 덮개를 씌우고 쇠꼬챙이를 박아놓은 것은 이순신의 발명으로 거북선에 오르는 적군이 뛰어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에 설치한 포를 처음 발사한 날은 1592년 3월 27일이었다. 첫 해전에 참가한 것은 같은 해 5월 29일 사천해전이었다. 또, 임진왜란 후에는 용머리는 거북머리로 바뀌는 등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15세기 최고 첨단무기로 평가되는 ‘신기전’
신기전은 1377년 최무선이 중국의 ‘비화창’이라는 화약 무기를개선 하여 발명한 ‘주화’를 1448년에 다시 개선하여 발명한 것으로 ‘세계 최초의 로켓 추진형 다연발 무기’로 국제우주학회도 인정한 15세기 최고 첨단무기로 평가되고 있다.
주화란 ‘달리는 불’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 최초의 로켓은 1232년 중국에서 발명된 ‘비화창’이라 할 수 있으며, 비화창이란 ‘날아가는 불창’이란 뜻이다. 그러나 비화창에 대한 기록이나 그림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반면 신기전은 1474년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자세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은 로켓병기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길이의 단위가 오늘날 0.3mm에 해당하는 리(釐)까지 사용한 것으로 밝혀져 신기전의 정밀도를 대변해주고 있다.
신기전은 소신기전·중신기전·대신기전·산화신기전 등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사용되어 그 위력이 입증되기도 했다.           
소신기전은 길이 3척3촌(1,011.5㎜)의 대나무 앞에 쇠 촉을 붙이고, 그 뒤에 길이 4촌7분(144.0㎜), 겉둘레 2촌1분(64.4㎜), 안지름 3분7리(11.3㎜)의 약통을 부착했다. 약통의 양쪽 끝은 종이로 막았다. 약통의 아래의 끝 면에는 지름 1분3리(4.0㎜)의 분사구멍을 냈다. 쇠 촉에는 독약을 묻혀서 사용했다.
중신기전은 길이 4척5촌(1,379.3㎜) 되는 대나무 앞에 쇠 촉을 붙이고, 그 조금 위에 길이 6촌4분(196.2㎜), 둘레 2촌8분(85.8㎜), 안지름 5분3리(16.2㎜)의 종이약통을 부착하였다. 약통의 앞부분에는 종이폭탄 소발화가 붙어 있다. 약통 아래의 중앙에는 지름 2분3리(7.0㎜)의 분사구멍을 냈다.
1451년 화차가 발명되면서 한 번에 100발씩 쏠 수 있도록 개량됐다.
대신기전은 대신기전은 약통을 종이로 만든 로켓 무기로서 영국의 콩그레브가 1805년 발명한 6파운더 로켓보다 더 큰 세계최대의 종이약통 로켓이다. 윗 둘레 1촌(30.7㎜), 아래 둘레 3촌(92㎜)에 길이 17척(5,210.5㎜)의 긴 대나무의 윗부분에 길이 2척2촌2분5리(682.0㎜), 둘레 9촌6분(294.2㎜), 안지름이 2촌2리(61.9㎜)의 원통형 종이약통을 부착했다. 약통의 앞부분에는 대형 폭탄을 부착했고, 목표물에 도착 전후에 폭발하도록 했다.
산화신기전은 ‘불을 흩뜨리는 신기전’으로 대신기전 약통의 윗부분을 비워놓고 그곳에 로켓의 일종인 지화통(地火筒))을 소형 폭탄인 소발화통과 묶어 사용하였다. 지화통은 종이를 말아서 만들었으며 중신기전과 소신기전약통의 중간 정도 크기다.

 우리 기술로 발명된 날아가는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비격진천뢰는 조선 중기에 군사목적으로 사용된 폭탄으로 진천뢰라고도 한다. 이 또한 독자적인 우리 기술로 발명된 날아가는 최초의 시한폭탄이다. 발사하면 목표물에 날아가 폭발하면서 천둥 번개와 같은 소리와 빛을 내며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는 무서운 무기다.
1986년 3월 14일에는 보물 제860호로 지정되었다.
발명가는 조선시대 선조 때 군기시 화포장이었던 이장손.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격진천뢰를 발명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비격진천뢰는 폭발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인 목곡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것이 발명의 핵심내용이다. 이는 현대기술로도 손색이 없다.
비격진천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서의 저서 ‘화포식’에 기록되어 있다. 이서는 화포식에 ‘비격진천뢰의 모양은 둥글고 부리는 네모이며, 그 부리에는 뚜껑이 있다.’고 설명하고, 이어 ‘비격진천뢰의 내부에는 도화선인 약선을 감는 목곡이 있고,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이 있으며, 내부에는 빙철이 채워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사용법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인 죽통 속에는 도화선인 약선을 감는 나선형의 목곡이 들어간다. 빨리 폭발시키려면 10곡, 늦게 폭발시키려면 15곡으로 약선을 감아서 넣는다. 죽통을 빙철과 함께 비격진천뢰 속에 넣고, 죽통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비격진천뢰의 규격은 지름 21cm, 둘레 68cm, 죽통 구경 5.2cm, 개철 구경 7.6×8.4cm, 화약혈 구경 6.2cm이다.
비격진천뢰의 둥근 모양의 형태에 표면은 무쇠이며, 내부는 화약과 빙철 등을 장전하여 폭발하면 파편을 쏟아내도록 했다.
이장손이 비격진천뢰의 발명가임과 발명의 우수성은 유성룡의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비격진천뢰는 이장손의 창안으로 대완구포로 발사하여 5~6백보 멀리 떨어지게 하고, 떨어지면 곧 바로 폭발하게 만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유성룡은 이와 함께 비격진천뢰의 위력이 수천 명의 군인보다 뛰어나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격진천뢰는 1592년 왜병에게 쫓겨 안강으로 진을 옮겼던 경상좌병사 박진이 경주 탈환 작전에 사용하여 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비격진천뢰는 일본의 기록인 ‘정한위략’에도 기록될 정도로 위력이 뛰어났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예일대학 학생 브슈넬의 발명 ‘잠수함’
사람이 배를 이용해 물고기처럼 물속을 항해해 보려는 생각은 옛날부터 있었다. 영국의 수학자였던 보온은 1578년 방수가죽으로 배를 씌워 수중에서 노를 젓도록 하여 움직이게 하는 잠수선을 설계했다. 또 1620년에는 네덜란드의 발명가인 드레벨도 보온의 잠수선과 비슷한 잠수선을 만들었다. 그 밖에도 여러 나라에서 발명가들이 잠수선을 설계했으나 실용성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늘날과 같은 첨단 잠수함의 기초가 된 발명은 1776년 당시 미국 예일대 학생이었던 데이비드 브슈넬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은 독립전쟁 중이었다.
종교적인 박해로 네덜란드에 피해 있던 영국의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일찍이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었다. 그때는 영국이 대영제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영국은 자기 나라에서 건너간 청교도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면서 그들을 괴롭혔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심해질수록, 자유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미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은 절실해져 갔다. 1755년에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은 치열했다. 산업혁명으로 눈부신 공업발전을 이룬 영국은 탁월한 무기와 군함을 앞세워 미국 독립군을 전멸시키려 했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병력이 형편없었던 미국 독립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바로 이때 바다 속으로 몰래 침투하여 적의 군함을 폭파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잠수함 발명에 도전한 사람이 있었다.  브슈넬이었다. 브슈넬은 매일같이 해안을 점령한 영국군 군함을 폭파시킬 수 있는 방법만 생각했다.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브슈넬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현상에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바다에 떠다니던 나무로 만든 타원형 와인 통이 물속으로 잠겼다가 한참 후에야 떠오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으나 이 같은 현상은 불규칙적이기는 했지만 반복되고 있었다.
‘바로 저 원리다. 저 원리로 물속을 드나들 수 있는 잠수함을 만드는 거다.’
원리를 깨닫자 연구는 일사철리로 진행되었고, 드디어 와인 통을 닮은 타원형의 잠수함이 탄생되었다. 1776년에 발명된 이 1인용 잠수함에는 터틀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잠수함을 타고 영국 군함을 공격할 임무를 맡은 리 상사와 브슈넬은 상기된 얼굴로 악수를 나누었다. 리 상사는 타원형의 터틀호에 큰 폭탄을 매달고 물속으로 영국 함대에 접근해 갔다. 그러나 잠깐의 실수로 터틀호와 폭탄이 그만 수면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리 상사는 폭탄이 터지도록 장치를 하고 곧 피신했다. 조금 뒤 뒤 요란한 굉음을 내며 폭탄이 터졌다. 군함에 있던 영국 수병들은 이 폭발에 놀라 배 안에서 우왕좌왕하며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잠수함을 이용한 군함의 공격은 실패하였으나 브슈넬의 터틀호는 영국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었다.
미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이와 같은 열망과 그에 따르는 인내와 희생정신은 열매를 맺게 되어 1781년의 결정적인 전투를 고비로 1783년에 드디어 영국의 압제를 벗고 ‘파리조약’에서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트랙터에서 힌트 얻어 발명한 ‘탱크’
‘위력이 큰 포를 탑재하고, 두꺼운 장갑으로 방호된 차체에 도로가 없는 곳에서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기관과 주행 장치를 지닌 전투 차량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같은 생각은 수많은 발명가들에 의해 탱크를 탄생시켰다.
탱크와 같은 무기의 필요성은 그리스·로마시대부터 느껴왔고, 실제로 그것이 결실을 맺어 채리엇이 발명되기도 했다. 채리엇은 2륜 마차로서, 병사가 타고 창과 칼로 실제로 전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무기의 등장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었다.
148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탱크를 생각했다. 그의 설계 중에 크랭크를 돌리거나 인력으로 작동하는 장갑 운반구가 있는데, 이것은 탱크와 같은 무기를 발명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에도 같은 생각을 하는 발명가들이 계속 이 분야의 발명에 도전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19세기 미국의 페닝턴과 1902년 영국의 심즈를 들 수 있다. 페닝턴은 바퀴에 금속덮개를 씌운 증기로 움직이는 장갑차를 발명했고, 심즈는 강철타이어를 장착한 장갑차를 발명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생산되어 실전에 배치되지는 못했다.
현대적 탱크를 발명하여 생산에 이르게 하고, 실전에 배치되는데 기여한 발명가는 영국의 육군 중령 어니스트 덥롭 스윈튼이었다.           
스윈튼은 제1차 세계대전 초에 적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트랙터에 화포를 장치한 전차를 발명했는데, 남아메리카에 머무르고 있을 때 광산에서 사용하는 트랙터에서 힌트를 얻어 이 발명을 했다고 한다. 광산의 한 기술자가 스윈튼에게 제공한 정보가 결정적인 힌트였는데, 트랙터의 무한궤도가 거친 농지를 가로지르는 강한 힘이 참호도 통과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무기에 대한 생산계획은 육군성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처칠이 해군의 예산으로 지원하여 세계 최초의 탱크가가 탄생했다.  이것은 M1 전차라고도 하였다. 이 탱크는 무게 28t, 최고속도 6km/h,  항속거리 약 20km, 57mm포 2문과 기관총 4문을 탑재하여 천하무적의 무기로 손색이 없었다.
탱크(Tank)라는 명칭은 신무기의 탄생을 적이 모르게 하기 위해 이용한 비익명인 수조(tank)에서 유래한다. 최초의 탱크는 실전에 배치되기 전에 시연을 했는데, 이 자리에는 2명의 장래 영국 총리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윈스턴 처칠이 참석했다.
탱크는 이후에도 영국의 해군 중위 윌슨을 비롯한 수많은 발명가들에 의해 꾸준히 개선되어 무기의 대명사로 떠오르며, 모든 전쟁에서 그 위용을 과시하게 되었다.

 프로펠러가 없는 초고속 비행기 ‘제트기’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선보여 전쟁을 속도전으로 바꿔놓은 제트기의 발명은 한 공군 장교의 불굴의 의지가 탄생시킨 발명으로 민간항공에도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발명가는 영국의 프랭크 휘틀. 19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휘틀을 만나보자.
1929년 12월, 워터링에 있는 중앙비행학교 실습실에는 휘틀 소위가 동료인 존슨 중위에게 제트엔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제트엔진은 과학자들도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고, 존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프로펠러가 달린 비행기는 아무리 빨리 날아도 시속 700km를 넘어설 수가 없어. 제트엔진이 필요해. 나는 기필코 제트엔진을 발명하고 말거야.”
존슨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휘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존슨, 자네마저 못 믿겠다는 건가. 자! 한번만 잘 들어보게. 엔진 앞에는 커다란 구멍을 뚫고 거기에 공기를 불어넣고 이 공기를 압축기로 압축시킨 다음에 연료에 불을 붙이는 거야. 폭발한 연료가스는 터빈을 사이를 지나 엔진에 붙은 다른 공간에서 아주 세차게 나가면, 그 반작용으로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날게 되는 원리야.”
순간 존슨의 고개가 끄덕였고, 이 내용은 곧 공군성에 제안되었다. 그러나 공군성의 답변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며 거절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에 물러설 휘틀이 아니었다. 휘틀의 연구는 진급 후에도, 전보 후에도 계속되었고, 급기야 자금 주까지 나타나 ‘파워 제트’라는 회사까지 설립되면서 활기를 띠게 된 결과 1937년에는 시제품이 완성되어 시험가동까지 하게 되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자금란에 시제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시험을 지켜본 휘틀과 공군성은 성공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동안 외면했던 공군성과 군수업체들이 앞 다투어 ‘파워 제트’회사를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공군성과 군수업체들의 관심은 때를 같이해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더욱 높아졌다. 특히 그 무렵 독일에서도 한스 폰 오하인이라는 발명가에 의해 제트엔진의 발명이 완료되어가고 있었고, 이 소식을 접한 공군성은 휘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휘틀의 연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충분한 자금과 풍부한 연구 인력은 1941년 드디어 완벽한 제트기를 탄생시켜 시험비행을 하게 되었다. 비행시험장은 제트엔진을 탑재한 비행기를 지켜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결과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이른 무렵이라 공군성은 즉시 대량생산에 들어갔고, 전쟁 중에 제트비행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같은 무렵 독일의 제트비행기도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왕연중(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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