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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에 소개된 모든 글의 저작권은 저자인 왕연중 선생님(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wangyj39@dreamwiz.com)에게 있습니다.
저자의 허락없이 무단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제목 : 발명유공자 지식경제인=1990~2008=(4)      

발명유공자 지식경제인=1990~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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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9년 5월 29일 (사)한국발명기업총연합회와 발명이야기(이해남 발명이야기 발행-편집인)가 공동기획하고, 한국발명진흥회-대한변리사회-(사)한국청소년발명영재단-우주영재과학이 협찬하여 발명이야기가 발행한 ‘발명유공자 지식경영인(1990~2008년)’에 실린 글이다.
이 책을 발행 편집한 이해남 발명이야기 대표는 당시 중견 발명가이자 한국발명진흥회 홍보이사로서 우리나라 각종 발명진흥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크게 기여했다.
이 책에 수기가 실린 주인공들은 금탑-은탑-동탑산업훈장, 포장,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포창, 장관 표창, 특허청장 표창 등을 수상한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발명기업인이다.
네 번째는 한국여성발명협회 창립 초대 회장이자 셀레늄공학연구소 회장 하상남 님의 글이다. 하상남 님은 현재 98세로 우리나라 최고령 발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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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여성발명협회 창립 초대 회장
   셀레늄생명공학연구소 회장
   현재 98세로 우리나라 최고령 발명가 하 상 남

  우리나라 최초 영화배우 출신 여성발명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이 시련과 역경에 부딪혀 그르치게 되면 보통사람들은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련이지 실패가 아니다. 내가 살아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현대그룹 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나 하상남 역시 그랬다. 한때 잘나가는 영화배우에서 발명가로 거듭나기까지 80평생 평범하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온갖 고난과 역경에서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 위기는 있어도 좌절은 없다는 신념과 배짱으로 당당히 맞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진 설명 : 1992년에 이어 2002년 독일국제발명전시회(IENA)에서 대상을 받고 기뻐하는 하상남 회장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나는 세리온이라는 신물질을 개발한 후 그 신기한 효능에 푹 빠져 한평생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나이 여든하고도 셋. 분명  고령의 나이 임에 틀림없지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8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탄력적인 피부와 미모를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움직임 또한 매우 민첩하고 건강하다고.’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내가 이렇게 건강하고 고운 피부를 유지하며 정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은 다름 아닌 나의 발명품 세리온 제품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세리온에 대한 연구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인류의 질병을 치료를 위해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는 발명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영화배우였다. 1944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46년 36mm 첫 번째 유성영화에 300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을 뚫고 당시 고려영화사의 주연급 배우로 발탁되어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로 스크린에 데뷔하였다.
신문에 이 사실이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됐다. 그 바람에 집안 몰래 한 일이 발각되고 만 것이다. 연예인을 ‘딴따라’로 멸시하던 그 당시에 충청도 양반 가문을 항상 강조하시며 우리를 엄하게 키우셨던 아버지로선 배우인 나를 달가워하실 리가 만무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한강으로 끌고 가서 딸년이 광대 짓하는 거 못 보신다며 차라리 당신께서 죽는 게 낫다고 물로 들어가셨다. 그러시는 아버지를 물속까지 따라 들어가 겨우 말렸다. 그때 아버지도 울고 나도 울고 정말 가슴이 아팠다. 나는 자유 만세로 영화배우 신고식을 치르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너무 심해 연기자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6.25 때 박격포 파편 맞아 오른쪽 장애
의학도였던 나는 해방이 되는 바람에 학업을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고, 그 후 경기산파학교 편입하여 1945년 면허증을 취득하여 산파 개업을 하고 오빠와 함께 약국도 운영했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하였고 피난 가는 길에 서대문에서 박격포 파편을 맞고 오른쪽 손목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지금이야 의술이 발달해서 그 정도야 쉽게 고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천막을 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임시국군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서울의과대학 임상 실습실에서 함께 실습을 했던 동료 의사 두 명이 뼈만 남고 완전히 으스러진 나의 손목을 자르려고 하다 하상남이란 것을 알았다.
동료 의사는 약이 부족하여 어머니와 언니한테 신당동의 우리 약국에서 페니실린과 마이신을 가져오도록 하여 성심을 다해 나를 치료했다. 다행히 파상풍균을 막고 목숨은 구할 수 있었지만 그 후로 내 손은 완전히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화려한 배우 생활을 경험한 나는 오른손을 다치고 얼마쯤 있다가 다시는 손을 쓸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자살을 기도하였다. 내가 약국을 할 적이라 직접 독약 30알을 만들어 먹었다. 바르비탈 수면제와 학질에 쓰는 키니네, 이 두 가지를 섞으면 웬만해서는 살아남지를 못한다. 지금은 한 알에 250mg이지만 그때는 캡슐이 500mg짜리였다.
나를 서울대병원에 데려갔을 때 벌써 죽었다고들 했다 한다. 그때 당시에는 허벅다리에 링겔을 꽂고 뜨거운 수건으로 마사지를 해서 링겔이 들어가게끔 하는 시대였다.
우리 오빠가 병원에서도 포기한 나를 살리기 위해 이틀 밤을 꼬박 세워 가면서 강심제를 5분에 한 번씩 놓았다고 한다. 나는 48시간 만에 맥박이 돌아왔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죽은 친구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할 정도로 후유증이 심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나를 황태와 잡곡을 푹 고아서 먹이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오빠의 극진한 간호가 날 다시 살렸다.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 꼬박 50일이 걸렸다.

  제3의 삶 영화 ‘별’의 주연으로 캐스팅
그리고 나는 제3의 삶을 살게 된다. 영화계가 하연남(당시 나의 예명)의 미모와 연기는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다며 영화 ‘별’의 주연으로 캐스팅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다시 스크린 제기에 나섰다. 1956년에 윤봉춘 감독이 유치진 원작의 ‘별’을 가지고 ‘처녀별’이라는 영화를 찍겠다고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다들 손 병신이 주연을 한다고 야단이 났다. 그런데 윤봉춘 감독은 나를 주연을 캐스팅하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윤 감독이 꿈을 꿨는데 오드리 햅번이 죽었는데 그 얼굴이 내 얼굴로 바뀌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이 예쁘고 연기가 좋으니까 나를 꼭 주연으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때 김진규 씨 및 김승호 씨 등과 같이 영화를 찍었는데 영화는 대박이 났고 극장마다 만원이었다.
손 병신이 영화를 찍고 인기를 얻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기배우의 출연료가 3∼5만 원이었던 당시 나는 50만 원을 받았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이렇게 나는 1946년 <자유만세>로 데뷔해 56년 대히트작 <처녀별>(윤봉춘 감독) <노들강변>(57년, 신경균 감독)등 10여 편에 출연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하였다.
한마디로 ‘손 병신’이라는 장애를 이겨내고 50년대 최고 배우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 故 김동리 선생께서는 “서양의 백조가 그레이스 켈리라면 동양의 백조는 하연남(나의 예명)이다.”라고까지 나를 극찬하셨다.

  영화배우에서 발명가로 변신
‘박수 칠때 떠나라’라고 했던가. 정상에서 내려올 줄 알아야 감동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조금 아쉬움이 있을 때 좋은 모습으로 스크린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화려한 배우로서의 삶을 미련 없이 벗어 던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의학도답게 당시 의학기술로는 다친 내 손을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혼자서 치료제를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발명과의 첫 인연이었다.          나는 약방과 조산원을 경영하면서 한방 의약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고서적 책방을 찾아다니다가 화타와 편작에 관한 의서를 발견하고 광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60년대 초 나는 광물질의 효능을 소개한 내용을 접하고 내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셀레늄이라는 항암, 항노화 미네랄에 관한 연구논문을 접하면서 셀레늄과 희귀 미네랄 등이 함유돼있는 ‘세리온’이라는 신물질을 발명해낸 것이다.
세리온은 정혈작용, 해독, 인체 세포 재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신진대사를 활성화하는 작용을 한다. 세리온의 효과를 확신한 나는 세리온 분말을 꾸준히 복용하면서 세리온 분말을 넣은 비누와 화장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움직이지 않던 손목과 손가락에 혈액이 돌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자신의 몸을 실험삼아 했던 발명이 효과를 본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세리온 연구에 빠져들었다.

  우리나라 최초 국가대표 빙상 선수와 결혼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나랑 친한 친구가 명동에 아주 물만두 맛있게 하는 집이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나갔더니 한 남자를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 바로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전신)출신인 이효창 씨였다.
이효창 씨는 일제시대 전 일본 빙상선수권대회를 석권하고 해방 후 1948년 노르웨이세계선수권 대회 1500m 2위, 5000m 3위를 차지한 스케이트 선수였다.
남편은 자유당 시절 상공부장관 비서관과 외자구매처 비서실장을 지내고 1947년 이승만 박사의 밀사로 유엔외교를 성사시켜 대한민국 건국에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내 남편은 정말로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우리 둘은 사랑을 하게 되었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나는 인생의 반려자로 이효창 씨를 만나 세리온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정릉 별장에서 살 때였다. 어느 날 꿈을 꿨는데 그 별장 앞마당에 똥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 친구가 셀레늄 분말을 가지고 온 것이다. 아산에 광산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부부 둘이서 성공시키라며 광산을 사라 했다.        우리는 당시 100만 원을 주고 샀다. 광산 근처가 온천지대라서 좋은 물질들이 많았다. 남편은 1943년 ㈜일본 삼공제약의 영등포 지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민관식 前 장관과 함께 직접 제약회사를 설립 할 정도로 의학지식이 풍부한 데다 나 역시 의학도로서 한방공부를 미리 해 둔 덕분에 연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1984년 여러 가지 광물질을 합성하여 세리온이란 신물질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일 국제발명전시회(IENA) 등 석권
세리온은 처음에는 분말을 가지고 수십 년을 연구, 실험했다. 우리 부부가 직접 실험하고 개, 고양이에게 먹여보고 환자들에게 직접 투여도 해 보았다. 밥을 못 먹던 사람이 먹게 되고 어딜 가도 안 된다던 사람들에게 먹여 낫게 했다. 그래서 마약을 넣었냐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지금 내가 만든 이 세리온 분말들은 다 나노입자로 만들어서 예전에는 찌걱거리는 느낌이 있었으나 지금은 먹기도 아주 좋다.
그리고 이어 세리온을 주성분으로 한 살균가습기 특수광물질 격막 부품을 만들어 1987년 삼성전자와 계약을 체결하고 납품을 하였다.
가습기 이름은 ‘삼성이온살균가습기 HU-8100S’. 정수·살균·가습을 동시에 라고 한 광고(삼성겨울용품)이란 1989년 책을 보관하고 있음. 제품이 출시될 때까지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연구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출입했다. 나 하상남도 삼성전자와 같이 앞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셀레늄 함유 화장품 비누 제조로 특허를 획득하고 1992년 독일 국제발명전시회(IENA)에서 세계발명인들을 물리치고 1등을 하였다. 시상식에서 “코리아, 하상남!”하고 호명을 한 것이다. 다들 깜짝 놀랐다. 비누가 대상을 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과학과 의학 수준이 선진국이었다. 그래서 나 하상남의 논문 속에 셀레늄에 관한 해설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1980년∼90년대만 해도 셀레늄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사부로부터 1984년도 공장 폐쇄 명령까지 받는 것이다. 이렇게 박해를 당하면서도 계속 연구하여 나의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독일 국제발명전시회(IENA)에선 대상인 IENA패와 금상 2개 부문을 2002년에 또 획득했다. 나 하상남은 영원히 IENA패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나 하상남의 생은 IENA패가 지켜주는 것이다. 의학을 아는 몇몇 변리사분들은 몇 세기가 지나도 이런 물질은 발견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들 한다.
IENA상 수상 이후 세리온의 효능을 널리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발명 외길을 걸어온 나는 또 한번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사람들이 시기와 모함을 하며 나와 회사를 깎아내렸다. 1996년 주요 방송과 뉴스에서는 내가 개발한 세리온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보도를 했다. 세리온이 시장에서 급격히 부상하자 시장을 선점하던 기존 기업들이 나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발명밖에 몰랐던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한때 전국 50여개의 대리점에 진출했을 정도로 붐을 일으켰던 세리온 비누도 찾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효능 인정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국내에서 인정하지 않은 세리온의 효능을 해외에서 이미 인정한 것이었다. 일본의 한 기업이 세리온을 전량 수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다. 그것도 현찰로. 나는 이를 계기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떨어진 나와 회사의 이미지가 회복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세리온 분말은 상처에 바르면 피를 멎게 하고, 이를 비누로 상품화한 세리온 비누는 아토피 및 알레르기성 피부병과 가려움증, 전염성질환 등에 특히 효능을 갖고 있다.
나는 세리온 이야말로 진정한 효과를 가진 신소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같은 위기에도 발명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한 30개 정도 특허를 받았는데 전부다 세리온과 관련된 것이다.
1996년 11월엔 식이성 무기 조성물의 제조방법으로 특허를 받았고 1997년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승인을 받아 효능을 입증받았다.

  2002서울국제발명전에서 WIPO상 등 국제전 석권 후 사업 순조
나는 ‘2002서울국제발명전’에서 식이성 무기 조성물의 제조방법이 높은 평가를 받아 WIPO상과 상금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독일국제발명전시회(IENA)에서 대상과 금상 2개를 받았고, 이어 같은 해 대한민국특허기술대전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상 외에 금메달 4개를 획득하면서 당당히 재기에 성공하였다.
홍보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써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제품은 계속해서 팔려나갔다. 사업이 바닥에 떨어진 지 6년 동안이나 걸렸지만 사람들이 세리온을 인정하면서 공장운영 등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2003년 지독한 음주와 흡연으로 몸이 많이 상한 남편이 그만 쓰러진 것이다. 나는 평생을 함께 한 동반자이자 은인이기도 한 남편의 치료와 재활에만 신경을 쓰기 위해 평소 아들처럼 여겼던 사람에게 인감도장을 맡겼더니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결국 믿었던 그 사람은 나를 배신한 것이다. 내가 간호 때문에 사업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그 사람이 공장 부지를 남몰래 처분했다. 결국 사랑하는 남편도 내 곁을 떠났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서 사업도 발명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편한 신체조건과 이를 비관한 자살 시도, 주변의 사람들의 모함과 질투, 가족과도 같은 사람에게서의 배신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면서 나를 떠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세리온의 효능에 대한 강한 신념과 자신감이었다.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결국 2008년 12월 세리온 비누에 이어 세리온 기능성 화장품인 ‘쎄시몽’을 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쎄시몽 역시 ‘노화 방지’와 ‘피부질환 예방·치료’효과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이름을 건 ‘하상남 세리온 피부.아토피 센터’도 중국 현지 병원에 건립 중이다. 쎄시몽 및 세리온 비누, 건강식품 및 피부보호 크림도 해외 진출을 앞두고 있다.
나는 세리온에 인생을 바쳐 큰 기업을 일구진 못했다. 하지만 내 발명품들이 전 인류의 건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아직도 내 책장에는 new perspectives on the essential trace elements, Rare EARETH EIEMENT 기초분자 생물학, 해양자원론, 미량원소, 광물학 원론, 토양과 문명, 요업 공학 개론, 피부과학, 화장품 원료학 등 손때 묻은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세리온에 대한 나의 변함없는 확신과 집념 때문이다.

  나는 발명가 하상남으로 기억되고 싶다
나는 여배우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도 봤고,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사업가이자 발명가가 됐다. 그래도 나는 발명가 하상남으로 기억되고 싶다. 사실 나는 일반인들이 발명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했을 때부터 발명 저변확대 위한 운동을 시작해서인지 발명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여성발명가의 한 사람으로서 여성들의 숨은 아이디어의 잠재능력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2년 IENA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난 이듬해인 1993년에 나는 한국여성발명가협회를 만들었고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발명이라는 걸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도 16년 전에 그렇게 씨를 뿌려놓은 덕분에 현재는 여성발명가협회 회원만도 4500명에 달할 정도다.
그 후 1998년 과학기술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 ‘한국어머니과학발명협회’를 창설하였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어머니들의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창의력과 발명 마인드 교육을 통해 아이들 발명의 저변확대를 위해서 창립한 것이다.
어머니들이 발명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갖도록 하고 1인 1발명 1특허 범 국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3권의 발명도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즉 1995년 역사적 발명 그 뒷이야기, 1998년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성공한 여성발명가들, 1998년 건강도 발명이 지켜왔다 등이다.
전국을 누비면서 캠프를 열고 아이들에게 상을 주고 대회도 많이 개최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발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여성발명가 중 절반이 전업주부일 정도로 발명의 생활화를 이뤄지고 있다.
사람들은 발명을 어렵게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생활에서 쓰는 것들을 어떻게 더 편하게 쓸까 고민하는 게 발명의 시작이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인적자원의 개발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발명조직의 확대와 발명 분위기 조성은 결국 기술한국, 선진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러한 점에서 발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부족한 때 발명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여성의 잠재력을 발명으로 유도하여 국가산업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한국발명단체총연합회 이해남 총장님과 한국여성발명협회 4대 회장을 맡고 있는 한미영 회장님의 역할과 노력이 매우 컸음을 밝혀두고 싶다.

 나는 경제의 기본이 과학과 발명에 있다고 생각한다. 발명과 과학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경제도 사는 것이다. 나도 발명을 하면서 많이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후배 발명가들이 맘껏 발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터를 닦아주고, 인류의 치료를 위해 발명을 계속할 것이다.

     참고로 나의 주요 수상경력은 다음과 같다.
    * 1984년 상공부 장관상
    * 1991년 대한민국특허대전 은상
    * 1992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발명전시회 은상
    * 1992년 독일 국제발명전시회 대상
    * 1996년 발명의 날 산업포장
    * 1998년 여성경제인의 날 산자부 장관상
    * 1998년 대한민국특허기술대전 은상
    * 2002년 연세법무법인 대상
    * 2002년 독일국제발명전시회(INEA) 대상
    * 2002년 독일국제발명전시회(INEA) 금상 2개
    * 2002년 대한민국특허기술대전 금상
    * 2002년 서울국제발명전시회 WIPO상 수상
    * 2002년 서울국제발명전시회 금상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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