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조기경보통제기(E-X)사업 대상자인 미국의 보잉과 방위사업청의 가격협상이 결렬됐다. 16억달러 미만을 생각하고 있는 우리 측 구매목표가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19억달러를 보잉 측이 제시한 것이다. 방위사업청은 재협상을 할 것인지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 연기할 것인지를 이번 주 중 결정할 예정이다.
외형상 이 문제는 판매자와 구매자 간에 있을 수 있는 줄다리기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받으려는 것이 파는 자의 인지상정일 터이고,한 푼이라도 깎으려는 것이 사는 자의 입장이니까. 하지만 백번 양보한다 해도 보잉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상궤를 벗어나 ‘배짱’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보잉은 우리 측의 추가 요구를 이유로 판매가를 당초 17억달러대에서 19억달러대로 높였다가,우리 측 반발이 거세지 17억달러대로 다시 낮췄다.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2억달러 가까운 액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내막을 일반으로선 알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여기엔 아주 단순한 상황논리가 개재되어 있다. 바로 ‘원천기술의 횡포’다.
E-X사업은 시종 이스라엘 국방부 산하기업 엘타의 G-550 기종과 보잉의 E-737 기종이 치열한 경합을 벌여 온 초대형 사업이었다. 초기 경쟁 구도에선 G-550이 현격한 우위에 있었다. 성능은 경쟁기종과 비슷하면서도 가격은 싸고,기술이전 등의 제반 조건도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달 3일 E-X 기종을 E-737로 선정,발표했다. 미국이 G-550 기종에 들어갈 핵심 장비에 대한 수출허가서 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G-550이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가 원천기술 사용승인을 거부함으로써 자국 방위산업체의 승리에 기여한 것인데,이 또한 엄밀히 따져보면 장사꾼의 횡포다.
미국의 원천기술 횡포로 우리가 직접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1995년 한·중원자력협정 체결 후 한국은 중국의 최적 파트너로 떠올랐다. 원자력 기술 및 원자력 안전기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보유하고 있는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지난 2월 실시한 원전 4기에 대한 국제입찰에서 우린 ‘예선 탈락’했고 미국·프랑스·러시아 등 3개국만 참여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당초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하려 했으나 원천기술을 인정받지 못해 참여가 무산됐다. 한수원의 원천기술은 예전 미국의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인데,CE는 중국 원전수주에 나선 웨스팅하우스(WEC)에 합병돼 한수원이 선정되면 WEC가 기술이전에 제동을 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원전 수출과 관련해 미국이 고리를 걸고 있는 기술은 한국표준형원전(OPR1000)과 차세대 원전(APR1400) 등 주요 기술과,냉각재펌프(RCP) 및 계측설비 등 미세 기술이다. 미세기술이야 필요시마다 구매하면 되니 그렇다 치고라도,한국표준형원전과 차세대원전 등 주요기술까지 자물쇠를 채워 놓는다면 차라리 우리한테 “원전 수출할 꿈도 꾸지 말라”고 공언하는 것이 낫다.
사실 한국의 원전기술은 우리나라가 ‘에너지’라는 이름으로 수출할 수 있는 고가의 수출유망품목이다. 특히 중국은 물론이고,베트남·루마니아 등도 우리 원전의 수입을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우방이라는 미국의 횡포 때문에 1기 당 2조원 가까운 고액 수출품목이 아직 한 건도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광복 후 60여년,각분야에서 한·미간 협력이 활발했지만,가장 성공적인 분야 중 하나가 원자력 분야다. 특히 우리의 원자력 평화 이용 사례는 미국도 인정하는 모범사례다. 하지만 미국이 원천기술을 빌미로 계속 횡포를 부린다면,미국 우방 맞느냐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무기는 언제나 사주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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