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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뜨는 온도계
언니는 눈은 퀭하니 들어갔고, 얼굴도 푸석푸석해 보였다. 아마도 밤새 한잠도 못잔 것 같았다.
“명진이는 아직도 열이 많은가 보지?”
나는 집안으로 들어서며 식구들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들 잠을 설친 듯 부스스해 보였다.
돌도 안 된 갓난아기가 불덩이처럼 열을 내며 아프니, 온 집안이 걱정으로 뒤덮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통 감기에 들렸담. 아직도 볼이 붉네.”
나는 정신없이 잠든 조카 명진이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가엾게도 어린 아기의 몸에선 열이 펄펄 났다.
“그러게 말이다. 열이 통 내리질 않네. 지난번 목욕 시킬 때 물이 너무 찼었나봐.”
언니는 말끝을 흐리곤 눈가를 훔쳤다.
“걱정하지 마. 금 새 나을 거야. 나도 어릴 땐 자주 아팠다며?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건강하잖아.”
나는 팔에 한껏 힘을 주어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익살을 부렸다. 어떻게든 언니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 괜찮아지겠지... 정말 엄마가 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
언니는 아기의 뺨을 다시 어루만지고는 힘없이 일어섰다.
‘휴우... 꼼꼼하기론 둘째라면 서러워할 언니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도록 했담.’
나는 아기와 언니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며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는 정말 꼼꼼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아기의 우유를 탈 때도 적량을 꼭꼭 재가며 타고, 아기를 목욕 시킬 땐 꼭 그 물의 온도를 정확히 측정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런 언니가 차가운 물로 아이를 목욕시켰다니...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나는 탐정이 된 기분으로 여지 것의 일을 다시 되짚어 보기로 했다. 아기가 감기에 들게 된 진짜 원인을 알아야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참 이상하군. 별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
아기가 감기에 들 무렵엔 아기와 함께 산보를 나간 적도 없고, 우리 식구 외에 다른 사람들이 드나든 적도 없었다. 또한 우리 식구들 중에서도 감기 기운을 느낀 사람은 없었는데... 게다가 집안 온도를 너무 높여 놓아서 딴 식구들은 전부 더워서 어쩔 줄 몰라 할 정도였고...
‘아무래도 비밀은 목욕물에 있나보다.’
나는 결국 아기가 감기에 든 원인은 목욕물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궁금증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아기와 같은 조건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비밀이 풀릴 것 같았다.
목욕물은 섭씨 45도로 맞춰두고, 목욕탕 문은 꼭꼭 닫았다. 아기가 목욕할 때와 똑같이 만든 것이다.
처음에 목욕물은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아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냥 물 속에 앉아 한숨 푹 자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 십 분쯤 지나더니 사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사이에 물이 식어 버려서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거야! 목욕하는 동안 물이 식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나는 무슨 굉장한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아기가 감기에 든 원인을 알아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그런데 집안 식구들은 내 발견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서야 알았냐는 식으로 쳐다봤다.
“당연한 것 아니야? 그걸 뭐 목욕까지 해가며 알아냈니? 남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언니마저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럴 수가!”
나는 너무 황당하여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실망한 표정 짓지 말고, 이번에는 진짜로 이 언니 좀 도와주라.”
“무슨 도움?”
도와 달라는 언니의 말에,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네 말마따나 목욕하는 중에 물이 식지 않니? 그래서 물의 온도를 계속 살펴봐야 하는데 이 온도계는 너무 불편해.”
언니는 작은 온도계를 흔들어 보였다.
“그래? 내게 맡겨줘. 멋지게 고쳐볼게 !”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좀 전까지 느꼈던 황당함이 일시에 씻겨가는 듯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온도계를 물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이리저리 궁리해보았다. 물의 온도를 정확히 재려면, 온도계의 수은주가 물속에 한동안 잠기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아기를 씻기는 도중에 그렇게 온도계를 들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온도계가 제 스스로 물위에 떠있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때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맞아 온도계에도 튜브를 끼워 주는 거야!”
나는 바닷물위에 둥둥 떠 있는 튜브와 사람들을 떠올리곤 환호성을 내질렀다.
온도계의 튜브를 장치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물에 잘 뜨는 스티로폼을 온도계의 중간에 끼워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자 온도계는 수은주를 물속에 담근 채 오뚝이 마냥 물위에 떠 있었다.
“자, 어때? 이렇게 하면 목욕도중에 계속 물의 온도 변화를 확인할 수 있겠지?”
나는 언니에게 온도계를 건네주며 활짝 웃었다.
“그래, 이젠 염려 없겠구나.”
언니는 얼굴에 담뿍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조카 명진이의 웃음같이 밝았다.
글 : 왕 연 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발명특허공무원학과 겸임교수)
(이메일 : wangyj39@dreamwiz.com 전화 : 011-890-8578 )
그림 : 김 민 재(만화가, http : //www.coolmorni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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