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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갈 때 가져 갈래
“얘들아,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알고들 있겠지?”
엄마가 빨랫감을 한 아름 안고 세탁기가 있는 욕실로 가면서 말씀하셨다. 토요일이라서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아름이와 빛이는 점심식사를 한 뒤에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내일은 늦잠을 자도 되고, 숙제도 쉬엄쉬엄 해도 된다는 생각 때문에 토요일은 늘 느긋했다. 그러나 오후만 되면 그 싫어하는 목욕을 해야된다는 생각에 머리가 무거워지곤 했다.
“오전엔 기분 좋지만 오후에는 머리가 무거워지는 토요일이죠, 엄마”
텔레비전의 만화영화를 보던 빛이가 정말 무거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재미있는 만화영화마저도 금방 눈 밖에 난 듯했다. 엄마는 욕실문을 열고 빨랫감을 내려놓더니 빛이를 돌아봤다.
“엄마는 너희들이 왜 그렇게 목욕을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나면 얼마나 시원하고 몸이 가볍니?”
“전 아무래도 어른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빛이가 되받아서 말했다.
“뭐가 그렇게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냐?”
“아빠는 그 뜨겁고 매운 콩나물국이나 조개탕을 드실 때마다 ‘어, 시원하다! 속이 다 후련하구나!’하시죠? 또 할머니는 등 밀어드릴 때마다 그 뜨거운 욕조 속에 들어앉아서 ‘에이, 시원타! 온 몸이 다 개운해지는구나!’하시구요. 그런데 엄마도 지금 뜨거운 물로 목욕하면 시원하다고 하셨잖아요? 어른들은 왜 뜨거운 걸 시원하다고 그래요?”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우리 말 사전에서 ‘시원하다’를 한번 찾아보렴. 그럼 의문이 풀릴 거야. 알았으면 빨래 끝나는 대로 목욕할 준비나 하고 있거라.”
엄마는 욕실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이어 세탁기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빛이는 어깨를 들었다 놓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름이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도망을 가버릴까?”
“도망?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뭐.”
“아예 가출을 해버려?”
그때 막내 고모가 불쑥 들어오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제 학교에서 퇴근하는 중이었다.
“가출을 한다고? 어머나, 아름아!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고모가 짐 챙기는 것을 도와줄 테니까 어서 준비해라.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 곁을 떠나서 살아봐야 한다더라, 얘.”
“아휴, 고모나 부모 곁을 빨리 떠나시지?”
“나더러 떠나라고? 정말 섭섭하구나, 아름아. 너희들이 갓난애 시절에 내 등에 오줌을 싼 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인데,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는 거니?”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 곁을 떠나서 살아봐야 한다면서요, 선생님 고모? 그렇다면 고모부터 실천을 해야지요. 나도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씀은 안다고요.”
‘장유유서’는 삼강오륜에 나오는 말로,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모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서 실내화를 신으면서 말했다.
“어쭈, 문자 쓰는구나? 너희들이 나가지 말라고 해도 때가 되면 시집을 갈 몸이시다. 그러나 난 그때까지는 집을 떠나기 싫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가출하고 싶은 너나 떠나란 말이야, 이 짱구야.”
고모는 아직도 세탁기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욕실 쪽을 한번 돌아보고는 두 남매 앞에 앉았다. 그러더니 다 안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이 너희들 목욕하는 토요일이다 이거렸다? 그렇다고 목욕이 싫어서 가출을 해? 도대체 너희들은 왜 목욕을 싫어하니?”
“너무 뜨거우니까 그렇지, 고모.”
빛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름이는 짧은 상고머리여서 간단했지만, 숱이 많고 긴 머리를 가진 빛이는 목욕할 때마다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뭐가 그렇게 뜨겁니?”
“정말이야, 고모. 어떤 때는 머리가 삶아져서 머리카락이 다 ᄈᆞ져버릴 것처럼 뜨거운 걸?”
고모는 그 말을 듣고 깔깔대며 웃었다. 사실 엄마는 여름에도 목욕물을 뜨겁게 데웠다. 그래야 때가 잘 벗겨지고 개운하다는 것이었다.
“찬물 좀 더 타줘요, 엄마.”
아름이와 빛이가 이렇게 투정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어김없이 발가벗은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철썩 갈겼다. 이 때만은 완전히 독재자요 폭군 같은 엄마였다.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름이가 뜨겁다고 징징대면서 목욕을 겨우 마친 다음에 엄마는 빛이를 욕실로 끌어 들였다. 욕실은 욕조의 뜨거운 물에서 피어오르는 김 때문에 짙은 안개 속 같았다. 엄마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발가벗은 빛이의 머리를 푸욱 담갔다. 그때였다.
“앗, 뜨거! 내 머리가 무슨 돼지머리라도 되는 줄 알아요, 엄마?”
빛리가 비명을 지르면서 욕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빛이는 털을 몽땅 뜯긴 뒤에도 살아서 겅중거리며 달려 다니는 닭처럼 거실 안을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빛이야, 난 아무것도 안 봤다!”
거실에서 머리를 말리던 아름이가 낄낄댔다. 그러자 물을 줄줄 흘리면서 팔짝대던 빛이는 다시 한번 놀랐다.
“어머나, 난 몰라!”
빛이는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갔고, 이어서 엄마가 엉덩이를 철썩 갈기는 소리가 났다. 이날 이후로 한참 동안 빛이는 ‘돼지머리’로 불리기도 했었다.
아름이와 빛이는 이제 엄마가 씻겨주지 않아도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사정도 해봤다. 그러나 엄마는 들은 척도 안했다.
“흥, 고양이 세수하듯 콧잔등에 물만 묻히고 말려구? 내가 너희들 속을 모를 줄 아니?”
고모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모습니더니 이런 제안을 했다.
“고모는 너희들처럼 슬기로운 아이들이 왜 그렇게 대책없이 고민만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우선 고민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를 짜내야 되지 않겠니?”
“대책?”
“그래. 문제는 목욕물이 너무 뜨겁다는 것 아니니? 그 이유가 뭘까?”
“그야 엄마가 좋아하시는 대로 물의 온도를 조절하니까 우리한테는 너무 뜨거운 거지.”
빛이의 대답을 들은 고모가 다시 말했다.
“그럼 너희들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온도를 알아서 엄마한테 부탁을 하면 어떻겠니? 아니면, 너희들이 온도계로 물의 온도를 조절하든가.”
“맞아!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실천해봐야지!”
빛이는 벌떡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세탁기에 물을 받으면서 빨랫감을 넣고 있던 엄마가 빛이를 쳐다봤다. 빛이는 잠시 엄마가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세제인 가루비누를 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스위치만 누르면 세탁기 혼자서 빨래를 할 것이었다. 빛이는 그때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소변보려고?”
“아녜요, 엄마.”
“그럼?”
“어서 하시던 일이나 마저 하세요.”
엄마는 다시 한번 빛이를 돌아보고는 커다란 세제통을 들었다. 그리고는 세탁기 안에 가루비누를 줄줄 흘러 넣었다. 빛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루비누를 듬뿍 넣은 엄마는 세탁기 뚜껑을 닫고 스위치를 돌렸다. 빛이가 엄마가 내려놓은 세제통을 들고 살펴보니까 엄마가 물으셨다.
“왜 그러니?”
세제통에 적힌 사용법에는 물 10L에 세제5g을 넣어 사용하라고 되어 있었다. 빛이는 새삼스럽게 존경스런 눈빛으로 엄마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우와! 엄마는 척 보면 세탁기 안의 물이 몇 리터인지, 세제가 몇 그람 들어갔는지를 알 수 있나 보죠?”
“무슨 소리냐?”
“금방 세제를 넣을 때 저울이나 용기로 양을 재어보지도 않고 그냥 줄줄 쏟아 부었잖아요?”
“그거야 대충 눈짐작으로 넣는 거지, 언제 물과 세제의 양을 제고 있겠니?”
빛이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는 아까 터진 쌀자루에서 아까운 쌀이 쏟아지듯이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던 세제를 떠올렸다.
“눈짐작이라구요? 아깝다….”
“너 그 얘기하려고 욕실에 들어왔니?”
“네? 아, 아녜요!”
빛이는 그제 서야 욕실에 온 용건이 생각났다. 세제와 목욕물이 뒤섞여서 머릿속에 잠시 뒤죽박죽이 되는 듯했다. 빛이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어서 이런 생각들을 털어버리고 말했다.
“이따 목욕물 받을 때 오빠랑 제가 온도 조절을 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드리려고 왔어요, 엄마.”
“또, 무슨 꿍꿍이속이냐?”
빛이는 세탁기가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면서 웅웅거리고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했다.
“사실은 오빠랑 제가 목욕하기가 싫어서 토요일마다 불평하는 게 아녜요. 그건 물이 너무 뜨겁기 때문이에요. 어른인 엄마 느낌에 적당하다는 온도이니 저희들한테는 뜨겁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저희들이 적당히 찬물을 섞어가면서 온도를 조절 할게요. 이제 봄도 가고 여름이 다 됐는데, 지난 토요일의 목욕물은 한겨울의 것보다 더 뜨거웠다고요.”
엄마는 잠시 빛이를 들여다보면서 생각을 하셨다. 빛이가 가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할 때 소리가 날 정도로 눈동자를 움직이는 버릇은 엄마한테 물려받은 것이니 모양이었다. 빛이의 눈동자 굴리는 소리가 ‘도르르 도르르!’라면 엄마는 ‘스르르 스르르!’였다.
“그럼 이번 한번만 시험 삼아서 그래 볼까?”
“어머나, 엄마! 정말 고맙습니다.” “그대신 목욕물은 받아 놓으면 금방 식으니까 좀 뜨겁다고 느낄 정도로 받아야 된다.”
“네, 엄마!”
그날 아름이와 빛이는 연신 손가락을 담가보면서 온도를 조절한 물로 목욕을 했다. 엄마는 물에 손을 넣어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안하고 머리부터 감겨주셨다.
머리를 감고 세수하기에는 아주 기분 좋을 만큼 따스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온 몸에 물을 끼얹은 다음에 비누칠을 하고 다시 물을 끼얹는데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엄마는 계속 입을 다물고 목욕만 시켜주는데 물은 점점 차갑게 느껴졌다. 나중에 몸을 헹굴 때는 냉기만 가신 찬물 같았다.
“차거워, 엄마….”
“차거워? 너희들이 온도를 맞추었잖니?”
목욕을 마치고나자 오싹 한기가 들었다. 얼른 물기를 닦고 옷을 입었다. 머리를 말리는데 전처럼 개운하지도 않았다. 목욕을 하다 말고 중간에 나온 듯했다.
(엄마 말씀이 맞구나….)
잠시 후에 엄마가 빗을 가지고 와서 아름이와 빛이의 머리를 빗어주면서 물으셨다.
“너희들 사람의 평균 체온이 몇 도인지 아니?”
“36℃ 내지 37℃요.”
“잘 아는구나. 그럼 목욕탕 물의 온도는 대략 몇 도나 되는지 아니?”
“글쎄요….”
아름이는 빛이를 돌아봤지만 빛이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대개 사람의 체온보다 3℃ 내지 4℃ 높은 40℃ 안팎이란다. 그러니까 처음에 탕 속에 들어갈 때는 살이 데일 것처럼 뜨겁게 느껴지지만, 잠시 후에는 그저 기분 좋게 따뜻한 온도잖니? 체온과 비슷한 온도이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오늘 너희들이 맞춘 물의 온도는 너희들의 체온보다 훨씬 낮았을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는 한기를 느낄 수밖에 없지.”
엄마는 아름이와 빛이의 머리를 빗어주고 나서 탈수를 한 빨래를 빨랫줄에 널어 말리려고 들고 나가셨다.
빛이가 아름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막대 온도계를 사다 욕실에 걸어놓고 물을 받으면서 쓰는 수밖에 없겠지, 오빠?”
“물을 받을 때마다 막대 온도계를 물에 담가놓고 온도를 조절한다구? 어휴,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무판에 끼워진 온도계를 물에 띄어놓고 물을 받는 게 낫겠다.”
“그거다, 오빠! 물에 뜨는 온도계!”
“물에 뜨는 온도계?”
빛이는 전화기 옆에 있는 메모지를 갖다가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했다. 일반 벽걸이용 온도계를 물에 띄우면 여러 모로 불편하니까, 민물낚시를 할 때의 찌처럼 똑바로 선 채 뜨는 온도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널빤지에 구멍을 뚫고 막대 온도계를 끼우면 되겠다.”
“당장 해보자, 오빠!”
아름이와 빛이는 창고로 가서 적당한 널빤지를 골라 톱으로 잘랐다. 손바닥만 하게 자른 널 판지를 주머니칼로 끝부분을 다듬은 다음에 거실로 가지고 왔다.
“내가 구멍을 뚫을 테니까 넌 저 벽걸이 온도계에서 알맹이만 꺼내와.”
빛이는 아름이가 시키는 대로 거실 벽에 걸린 온도계를 내려서 막대 온도계를 뜯어냈다. 그리고는 주머니칼로 널 판지에 구멍을 뚫는 아름이 옆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구멍을 다 뚫은 아름이는 막대 온도계를 끼웠으나 구멍이 너무 컸다. 빛이는 그것 하나 제대로 못 뚫느냐는 눈빛으로 아름이를 쳐다봤고, 아름이는 처음 것 옆에 다시 구멍을 뚫게 시작했다.
이번에는 꼭 맞을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약간 좁아서 온도계가 잘 끼워지지 않자 빛이가 말했다.
“약간 좁은데, 오빠?”
“아냐, 이 정도는 되어야 헐거워져서 빠지는 일이 없지.”
아름이는 막대 온도계를 천천히 비틀면서 끼웠다. 그러나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길이도 못 끼우고 온도계가 툭 부러져버렸다.
“아차!”
“수은 조심해, 오빠!”
아름이는 알맹이 없는 벽걸이 온도계와 널빤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용돈을 털어 빛이에게 주었다.
“가서 막대 온도계 하나 사와. 나는 그동안에 다른 널ᄈᆞᆫ지를 만들어 놓을 테니까.”
“알았어, 오빠.”
빛이는 밖으로 나갔고 아름이는 다시 창고로 갔다. 아까 잘라낸 널빤지를 다시 집어들던 아름이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전자제품 상자 속에서 나온 스티로폼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렇지! 널빤지보다 물에 잘 뜨고 막대 온도계를 끼워 넣기도 쉬운 스티로폼을 쓰면 되겠다.”
아름이는 스티로폼을 찻잔 접시만 하게 잘랐다. 그리고는 빛이가 사온 막대 온도계를 스티로폼에 끼워 넣었다.
“됐다, 오빠!”
아름이와 빛이는 욕실로 달려갔다. 욕조에는 아까 쓰고 남은 물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아름이는 스티로폼에 끼운 온도계를 띄었다. 그러자 ‘물에 뜨는 온도계’는 물이 찰랑거림에 따라 종이배처럼 흔들거리면서 온도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성공이다!”
아름이는 엄마한테 자랑하기 위해 물에 뜨는 온도계를 들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아름이 뒤를 따라 나가려던 빛이는 세탁기 앞에서 문득 멈춰 섰다. 아까 엄마가 세탁기에 쏟아 넣던 세제 생각이 난 것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기사 내용이 떠올랐다. 그 기사는 수질오염 문제를 다룬 것으로 기억되었다. 수질오염, 즉 물을 오염시키는 원인은 공장에서 정화시키지 않고 흘려보내는 페수 때문만으로 알기 쉽지만, 가정에서 흘려보내는 생활하수의 영향도 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활하수를 주로 오염시키는 것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각종 세제라고 했다.
(그런 세제를 눈짐작으로 쏟아 부어 사용하는 것은 수질오염이나 소비절약 측면에서 보면 적지 않은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물과 세제의 양을 눈짐작으로만 사용할까?
세제 사용 설명대로 하면 빨래가 잘 안 될까? 가정에 세제나 물의 양을 잴 수 있는 기구가 없어서일까?)
빛이는 학교 과학실을 떠올렸다. 과학실에 있는 각종 계량기로는 그람과 리터 단위의 양을 알아내기 편리할 것이었다. 빛이는 욕실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께 부탁해서 한번 실험해봐야지.)
엄마는 오빠와 마주 서서 물에 뜨는 온도계를 살펴보고 있다가 빛이가 욕실에서 나오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좋은 것을 만들었구나, 얘들아. 다음 토요일부터는 이걸로 목욕물 온도를 맞추면 되겠다. 사실은 엄마도 짐작으로 목욕물의 온도를 맞추다보니까 어떤 때는 정말 너무 뜨겁기도 했거든. 그건 그렇고 너희들 여기 좀 앉아 봐라. 엄마랑 발명 퀴즈 놀이를 한번 해보자.”
아름이와 빛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소파에 앉으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엄마가 발명 퀴즈 놀이를 하자니 우습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궁금한 게 있으세요, 엄마?”
아름이가 물어 보았다.
“그래, 너희들의 아이디어를 좀 빌려야겠다.”
“저도 붙여주세요, 언니.”
그때 2층에서 내려오던 고모가 말했다. 빛이가 자기 옆에 앉는 고모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고모도 혼자서 풀기 힘든 궁금한 점이 있는 거지?”
“너 세계적인 여성 발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기 전에는 심령과학자가 되겠다고 했었지? 역시 다르다.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맞히니?”
“척하면 삼천리요, 앉아서 보면 구만 리에, 서서 보면 십만 리라!”
빛이의 능청에 네 사람은 한바탕 웃었다. 그러고 나자 고모가 엄마를 재촉했다.
“어서 문제를 내보세요, 언니.”
“그럴까요, 아가씨? 이건 빨래를 할 때마다 신경 쓰이는 일이라서…. 문제는 두 가진데, 그 하나는 스웨터를 세탁해서 말리는 일이야. 빨랫줄에 널거나, 옷걸이에 걸어서 빨랫줄에 널거나 마찬가지로 추욱 늘어지는 게 스웨터거든. 그러다보면 모양이 우습게 되고 말아.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
네 사람의 시선은 저마다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빛이는 그냥 앞을 바라보면서 눈동자만 열심히 굴렸고, 아름이는 천장을 쳐다봤으며, 고모는 팔짱을 낀 채 벽을 바라보았다. 또 엄마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 아름이가 비시시 웃자 엄마가 돌아봤다.
“생각났니?”
“그러니까 문제는 물먹은 스웨터가 처지는 것 아녜요?”
“그렇지!”
“간단해요, 엄마. 생선구이 할 때처럼 망 위에 널어 말리는 거예요. 그런 망이 없으면 접시처럼 생긴 대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넓은 소쿠리 위에 말려도 되겠죠,”
엄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때 빛이가 나섰다.
“전 할아버지가 여름에 안고 주무시는 죽부인 생각을 했어요.”
죽부인이란 대오리로 긴 베개처럼 길고 둥글게 엮어 만든 것으로, 여름에 안고 자면 서늘한 기운이 돌게 해주는 것인데 빛이가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낸 것이다.
“죽부인을?”
“네, 엄마. 그렇게 생긴 플라스틱 원통을 만들어 스웨터를 감고, 그 위에 다시 플라스틱 망을 덮어 물을 짜낸 다음에 그대로 말리는 거예요.”
엄마는 머릿속으로 빛이가 설명한 물건을 상상해보면서 머리를 주억거렸고, 고모는 빛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역시 발명가 오누이답구나. 아주 멋진 아이디어야. 근데 언니 아까 문제는 두 가지라고 했는데….”
“또 하나는 세탁기를 사용할 때 드러나는 문제점이에요,”
세탁기에는 여러 가지 빨랫감을 한꺼번에 넣고 빨기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까 스웨터나 면제품의 보푸라기가 다른 옷이나 양말 등에 달라붙어서 그걸 일일이 손으로 떼어내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보푸라기가 잘 달라붙는 양말 같은 것은 아예 뒤집어서 세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었다.
“이 보푸라기를 없애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
“힌트는 없나요, 언니?”
고모가 묻자 엄마는 이런 얘기를 하셨다.
“글쎄요. 세탁기의 물은 빙글빙글 돌고, 보푸라기는 물 위로 떠오른다는 점이 힌트가 될지 모르겠는데요?”
“그럼, 간단해요. 엄마!”
빛이가 대뜸 자신 있게 말했다.
“어떻게?”
“곤충 채집을 할 때 쓰는 포충망 있죠? 그걸로 보푸라기를 건져내는 거예요.”
엄마는 약간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그러나 밝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좋은 생각이구나, 빛이야.”
그때 고모가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포충망으로 일일이 건져내자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그 포충망을 약간 달리 쓰면 될 것 같아요.”
고모의 설명은 이랬다. 소용돌이처럼 세탁기 안의 벽에 부딪치고 너울거리면서 중앙으로 감돌아드는 세탁기 속의 물의 성질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포충망 같은 그물을 만들어 양쪽에 고무 흡입판은 달아 세탁기 안에 붙여 놓으면, 소용돌이를 타고 떠다니던 보푸라기들이 자연스럽게 망 속으로 흘러들게 된다는 이치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아가씨!”
엄마가 그렇게 말하며 소리치자 아름이도 박수를 쳤다. 그러나 빛이는 샐쭉해진 모습으로 입술을 쑤욱 내밀었다.
“칫, 남의 아이디어나 이용해먹고?”
“미안하다, 빛이야. 그렇지만 발명의 원칙 중에는 ‘남의 아이디어를 빌리는 것도 발명’이라는 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겠지?”
“그래도 얄미워, 고모.”
고모는 빛이를 꼭 끌어안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러자 빛이는 금방 얼굴이 퍼졌고 아름이가 다음차례를 재촉했다.
“이젠 고모 차례야. 빨리 문제를 내봐.”
“알았다, 짱구야. 내 옷장에는 옷걸이가 여러 개 있거든? 내 옷걸이, 철사 옷걸이. 플라스틱 옷걸이, 철사에 비닐을 씌운 옷걸이 등이 있는데, 양복을 오래 걸어두면 어깨가 축 늘어지면서 옷 모양이 흉하게 변해버리거든.”
“양 어깨가 둥글게 된 옷걸이가 있잖아, 고모.”
“그걸 누가 모르니? 그건 너무 비싸니까 값싸면서도 어깨가 늘어지지 않는 옷걸이가 없겠냐는 것이지.”
아름이와 고모가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엄마가 주저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마치 주눅 든 아이가 꾸중 들을 걱정부터 하면서 말하는 모습 같았다.
“나도 평소에 늘 생각하던 문제라서….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상상에 지날지 모르겠지만….”
“뭔데요, 언니?”
“아이들이 갖고 노는 비닐 동물이 있죠? 왜 바람을 불어 넣어서 가지고 노는….”
“그런데요?”
“그것처럼 비닐로 어깨를 둥글게 한 옷걸이를 만드는 거예요. 사용할 때는 바람을 넣어서 쓰고 평소에는 바람을 빼서 접어 둘 수가 있으니까 여행용으로도 좋고…”
엄마는 여전히 자신 없는 표정으로 쭈뼛쭈뼛 설명해 나갔다. 그러나 그 말을 자세히 듣고 있던 고모는 손뼉을 치면서 멋진 아이디어라고 감탄했고 아름이와 빛이도 큰소리로 박수를 쳤다.
“과연 우리 엄마야. 나중에 제가 세계적인 발명가가 되면 그건 순전히 엄마 덕분이에요,”
빛이의 넉살에 다들 한바탕 웃었다. 빛이와 아름이는 이날 있었던 일들을 모두 발명일지에 그림과 함께 기록했다. 물론 빛이는 아름이보다 한 가지 더 기록했다. 세제의 효과적인 사용 방법에 관한 연구 문제였다.
다음날 학교에 간 빛이는 선생님께 자신의 생각을 말씀드리고, 과학실에 있는 각종 계량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빛이의 생각을 들은 선생님은 아주 좋은 계획이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책임을 지고 과학반 선생님께 부탁드려서 허락을 받아주지. 그 대신 꼭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
“네, 선생님!”
그뿐이 아니었다. 과학반 선생님은 여러 가지 실험기구들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면서, 그 사용 방법들까지 자상하게 가르쳐주셨다.
빛이는 즉시 실험에 들어갔는데 우선 가루비누1g의 양을 재보았다. 그런데 그 양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 것이었다. 엄마가 사용하던 세재의 양은 사용 설명에 나와 있는 기준에 비해 대여섯 배는 많은 것 같았다.
(사용 설명대로 한다면 세제는 아주 적은 양인데, 그래도 세탁은 잘 될까?)
다음에는 물의 양을 0.5l 단위로 재보았다. 여러 가지 그릇으로 측정해 본 결과 플라스틱 바가지는 약 2l 정도의 물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가루비누는 한 바가지의 물에 1g (물 10l에 세제 5g이라고 했으니까)을 넣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대부분의 가정주부들이 엄마처럼 세제를 사용 설명보다는 눈짐작으로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 가정한다면, 일 년 동안 전국에서 낭비되는 세제의 양과 그에 따르는 수질오염의 정도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일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빛이가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예를 들면, 세제를 제조한 회사 측의 사용 설명을 믿지 않는 불신풍조라든가, 집안에 그람이나 리터 같은 단위를 쉽게 가늠할 수 있는 계량기나 그릇이 없다든가 하는 점들이었다.
그래서 빛이는 우선 집에서 사용지시에 따라 사용량을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았다. 분유통에 든 숟가락이나 물약에 들어 있는 컵 등에는 눈금 표시가 되어 있어서 쓸 만 했다.
빛이는 분유 숟가락에 세제 0.5g의 양에 따르는 눈금을 표시하고, 플라스틱 바가지에는 세제 0.5g에 해당되는 물1l의 단위로 표시를 했다. 그런 다음에 세제통에 적힌 사용 설명대로 물과 세제를 섞어 세탁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세탁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이 깨끗이 빨아지는 것이었다. 이로써 얼마나 많은 세제가 눈짐작에 의해 낭비되고 있는지 증명된 셈이었다.
과학반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은 빛이의 실험결과에 아주 흡족해하면서 많은 칭찬을 해주셨다. 그리고 엄마도 빛이가 만들어준 분유 숟가락과 바가지로 세제의 낭비가 없는 세탁을 하겠노라고 약속하셨다.
기분이 으쓱해진 그날 저녁이었다.
“엄마, 그게 뭐예요?”
“참기름이다, 빛이야.”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 엄마를 도와드리고 있던 빛이가 물었다. 무침 반찬에 참기름을 붓던 엄마는 병뚜껑을 닫으면서 빛이를 돌아봤다.
“참기름은 많이 칠수록 좋은 거예요?”
“반찬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지나치거나 모자라서 좋을 것은 없지. 참기름도 적당히 치면 고소한 맛이 나지만, 너무 많이 치면 느끼해서 안 좋단다. 근데 왜 그러니?”
“엄마가 지금 도라지 무침과 북어무침에 참기름을 치는 모습이, 마치 세탁기에 세재 부을 때처럼 눈짐작으로 하시는 것 같아서요.”
엄마는 그때서야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무침 반찬을 손으로 집어 맛을 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엄마가 밥을 할 때 쌀의 양이나 물의 양을 눈짐작으로 하고, 또 반찬을 만들 때 갖가지 양념을 눈짐작으로 넣는 것은 오랜 경험에 의한 것이어서 거의 계량기로 잰 듯이 정확하단다. 맛을 보면 알잖니? 그것이 다 손끝 맛이란다. 자, 너도 한번 맛을 보렴.”
엄마는 도라지 무침을 집어 빛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약간 아리면서도 흙냄새와 뒤섞인 듯 한 쌉쌉한 맛이 가볍게 코끝을 풍기면서, 고소한 참기름과 깨소금 맛을 느끼게 했다.
“어떠니? 지나친 양념 맛이라도 나니?”
“아뇨, 엄마, 입에 딱 맞아요.”
“그것 봐라. 그렇지만 세탁할 때 세제와 물을 정확하게 쓸 수 있는 그릇을 만들었듯이, 참기름의 양을 정확히 잴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보고 싶으면 해보렴.”
“알았어요, 엄마. 그런데 어떤 음식에 얼마만큼의 참기름이 들어가는지는 엄마가 도와주세요.”
빛이는 우선 참기름 양을 정확히 잴 수 있는 기구를 찾아냈다. 분유통에 있는 숟가락이나 물약에 들어있는 작은 컵보다 편리한 것이 있었다. 눈금표시가 되어 있는 주사기였다.
이 주사기로 참기름의 양을 재어 작은 비닐 컵에 5ml 단위로 표시를 했다. 그런 다음에 엄마의 협조를 얻어 반찬과 요리별로 참기름을 치는 양을 기록했다. 이 작업은 반찬을 만들 때마다 한두 가지씩 했기 때문에 여러 날이 걸렸다.
한 달쯤 후에 빛이는 각종 음식에 치는 참기름의 양을 기록한 표를 만들었다. 엄마는 그 표에 비닐을 씌어서 부엌 벽에 붙였다.
“고맙다, 빛이야. 네 덕분에 세제와 참기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때 고모가 부엌에 들어와서 그 표를 살펴보더니 빛이에게 말했다.
“얘, 감초야. 고모 시집갈 때 이걸 가져가도 괜찮겠니?”
“안 돼, 고모!”
“제발 부탁이다, 빛이야. 네가 만든 이 표를 살펴보니까 참기름을 아낄 수 있는 방법도 들어있지만, 각종 반찬과 요리를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책의 구실도 할 수 있겠구나.
“글쎄, 안 된다니까!”
“아니, 왜 안 된다는 거니?”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고모? 내가 시집갈 때 가져가려고 그래,”
“뭐라고?”
엄마는 물 묻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크게 웃었고, 머쓱해진 고모는 빛이의 머리에 아프지 않게 알밤을 먹였다.
=출처 : 발명하는 어린이들(글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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