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엉덩이를 따뜻하게
숙제를 하고나서 복습과 예습을 마친 아름이는 종이로 로봇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로봇 전문가가 되는 게 꿈인 아름이는 시간만 나면 로봇의 모형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렸다.
로봇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름이의 관심을 끌었다. 소설, 만화, 영화, 장난감, 심지어는 요즘 텔레비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로봇 춤’까지 다 좋아했다. 아름이가 식구들 앞에서 팔과 다리의 관절을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면서 로봇 춤을 추면 요란한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오곤 했다.
“꼭 허수아비가 춤추는 것 같다, 얘.”
걸핏 하면 아름이와 티격태격하기 일쑤인 막내 고모가 언젠가 한 말이었다. 사실 아름이의 로봇 춤 솜씨는 로봇 모형 만들기에 비하면 형편없는 것이었다.
춤 솜씨야 어쨌든, 아름이의 로봇에 대해 야심은 대단했다. 미래의 세계는 반드시 로봇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아름이는 늘 이렇게 큰소리쳤다.
“방사능을 써도 끄떡없고, 어려운 계산도 척척 해내며, 까마득하게 높은 빌딩이나 섬처럼 커다란 배를 짓는 일도 거뜬히 해치우고, 바다 밑이나 화산 속이나 공기가 없는 곳이나 남극과 북극처럼 추운 곳에서도 인간 대신 일을 해내는 로봇을 반드시 만들어 낼 거야. 그때 가서 값싸고 똑똑한 비서용 로봇 하나 만들어달라고 통사정하지들 말고 지금부터 나한테 잘하라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로봇 모형을 오려서 풀로 붙이고 있는데 빛이가 들어왔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 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로봇의 머리가 떨어질 뻔했다.
“짱구 오빠!”
“버르장머리 없이 오빠더러 짱구가 뭐냐?”
“어머나, 이 주둥아리... 미안해, 오빠.”
빛이는 아양을 부리면서 아름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름이가 만들던 로봇을 보더니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면서 소리 질렀다.
“어머, 귀여워! 이게 무슨 로봇이야, 오빠?”
“아직 이름은 안 지었어, 근데 무슨 일이냐?”
“그냥 심심해서.”
“심심하면 간장이나 먹지 그래.”
아름이가 깨진 뚝배기처럼 투박하게 받아치자 빛이는 금방 새침해졌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펴면서 다시 아양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부탁이나 물어볼 것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사실은 발명 퀴즈 놀이 하자고 왔어.”
아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무언가 혼자서는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물론 네가 내겠지?”
“맞았어, 오빠.”
“그럴 줄 알았어. 자. 바쁘니까 어서 문제를 내봐.”
“학교에서 칠판에 적힌 것을 필기하다보면, 빛이 반사되어서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많잖아?”
“그렇지. 그 경우 칠판은 거울과 같기 때문에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반사되고, 그 방향에 앉은 학생은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게 되지.”
“그러니까 그 빛이 반사되지 않는 칠판을 만들 수는 없을까?‘
아까 학교에서 한 학생이 칠판 글씨가 안 보인다고 하자, 선생님은 그 학생의 자리를 임시로 옮겨주었다. 그때부터 빛이 반사되지 않는 칠판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놀러 나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궁리했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래서 오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었다.
“그까짓 것도 문제라고...”
“방법이 있어, 오빠?”
“방법이야 있지. 만들기가 어려운 게 문제지만 말야.”
“어떻게 만들면 빛이 반사되지 않을까?”
“과일 같은 걸 담는 직사각형 모양의 접시를 생각해봐.”
빛이는 잠시 허공을 바라모면서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얼른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잘 들어봐. 상하좌우가 약간 안쪽으로 휘어지게 만들면 절대 빛이 반사되지 않을 거야.”
“피이, 그런 칠판을 어떻게 만들고, 또 어떻게 쓴단 말이야?”
“어쨌든 빛이 반사되지 않은 칠판이잖아?”
“발명반 활동을 하는 오빠가 겨우 그 정도라니...”
실망한 빛이가 이죽거리자 아름이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킥킥거렸다.
“남은 심각한데 왜 킥킥거리고 그래?”
“발명반 얘기를 하니까 발명반에서 있었던 일이 문든 생각나서 그러는 거야. ”
“무슨 일인데?”
“오늘 특별활동 시간에 우리 발명반에서는 개인 사례 발표회가 있었거든.”
“그게 뭔데?”
“자기가 그동안에 발명한 사례를 발표하는 거야. 그런데 6학년들 가운데 강진순이란 형이 있거든. 그 형이 발표한 게 뭔지 알아?”
“뭔데?”
다시 컥컥거리면서 궁금해 하는 빛이를 감질나게 하던 아름이는 오늘 발명반에서 있었던 진순이의 발표 내용을 들려주었다. 진순이는 큰 키에 뚱뚱한 몸집이 약간 둔해보였지만, 가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곤 했다. 그런 그가 오늘 발표한 발명 제목은 지난 겨울방학 때 발명한 ‘따뜻한 양변기 좌판’이었다.
진순이와 동생 진혁이는 겨울에 가장 싫은 것이 화장실 가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화장실에서 무슨 도깨비나 귀신이 나와서 무섭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옷을 벗고 변기에 앉을 때 엉덩이에 차갑게 와 닿는 좌판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혁이는 좌판 위에 발을 딛고 올라앉기까지 했다.
“사내대장부가 그까짓 것을 못 참아서 오도 방정을 떠는 게냐?‘
아빠가 엄하게 꾸증을 하셨지만. 어쨌든 차가운 좌판은 질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예쁜 분홍색 천으로 만들어진 좌판 싸개를 사오셨다. 그걸 변기 좌판에 씌우고 앉아보니 부드럽고 폭신한 게 아주 좋았다.
“이런 멋진 발명품이 있는 걸 모르고...”
그러나 그 예쁜 좌판 싸개는 하루도 못가서 실망을 안겨주었다. 세수나 목욕을 하면서 물이 튀어 축축하게 젖자 훨씬 더 차갑고 불쾌한 것이었다, 그러니 수시로 빨아서 말려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물에 젖지도 않고 폭식하며 따스한 감촉을 주는 좌판싸개는 없을까?’
그 이튿날이었다. 시장에 갔던 엄마가 이번에는 전혀 새로운 변기의 좌판 덮개를 사오셨다. 얇은 스티로폼으로 만든 것 이었는데, 안쪽에 동전만한 접착부위가 있어서 좌판에 붙게 되어 있었다. 천으로 만든 싸개의 촉감보다는 못했지만, 차가운 좌판에 맨살이 닿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물이 튀어도 마른 걸레나 화장지로 간단히 닦아낼 수가 있었다.
“천으로 만든 좌판 싸개가 물에 젖는 결점이 있으니까 이런 게 나왔구나?”
진순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자기도 발명을 좋아하고, 또 그래서 발명반에서 활동을 하지만, 매일 생활하면서 대하는 수많은 물건들을 볼 때마다 그것을 발명한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존경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얀 백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필요한 물건들이 하나둘 발명되어서 오늘을 이루었다는 생각을 하면, 발명이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스티로폼 좌판 덮개는 그런 대로 쓸만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접착부위가 떨어져 덜렁거리더니, 엉덩이에 붙고 눌리면서 찢어지는 것이었다. 진순이와 진혁이는 차가운 변기 때문에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래 ! 이걸 발명 목표로 삼아서 한번 해결해 보자.’
발명일지에 여러 가지 모습의 변기 그림을 그려가면서 며칠 동안 연구를 하던 진순이는 문득 발명반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발명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든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미 발명된 어떤물건에 보태거나 빼거나 고치거나 바꿔서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맞았어! 문제는 변기의 좌판에 있는 것이니까, 좌판만을 개조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자.’
그날부터 진순이는 동생 진혁이와 함께 과학백과사전 같은 책을 뒤져가면서 아이디어 찾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진순이는 물리학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진혁이는 형처럼 크고 뚱뚱한 덩치를 이용해서 유도선수가 되겠다고 했다. 그런 진혁이 변기 위에 올라앉아서 중심을 잡는 운동신경은 발달되어 있었지만, 아이디어를 찾는 데에는 좀 떨어졌다.
그래서 거의 혼자서 연구를 하다시피 진행해나가던 진순이는 어느 날 안방에 깔린 전기장판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영감을 얻었다.
“바로 이거다!”
뜨개질을 하시던 엄마가 화들짝 놀라서 쳐다봤다. 십 년 탐험 끝에 보물이 숨겨진 동굴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하는 진순이를 쳐다보던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었다.
“간 떨어질 뻔했다, 이 녀석아. 그래 뭐가 어떻다는 거냐?”
“변기 좌판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엄마!”
“그래?”
진순이는 궁금해 하는 엄마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저금통을 털어서 단숨에 동네 전파사로 달려갔다.
“전열기에 쓰는 열선 있죠? 니크롬선 말예요.”
“전열선? 그건 뭐하려고?”
고장 난 텔레비전을 수리하고 있던 전파사 아저씨가 안경을 벗으면서 물었다. 진순이는 변기의 좌판에 전열선을 장치해서 따스하게 하려는 의도를 자세히 설명했다.
“허허, 전기장판처럼 따스한 변기라? 그것 좋은 생각이로구나.”
“그렇죠, 아저씨?”
“그렇지만 이걸 알아야 한다, 꼬마야. 이 니크롬선은 100V 용이라서 물이 묻거나 직접 몸에 닿으면 큰일 난단다.”
“아, 전압이 높으면 감전될 위험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군요.”
“이제야 알겠니?”
“네, 아저씨... 그럼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아저씨는 전압을 조절하는 변압기, 즉 트래스를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니크롬선을 짧게 해서 장치하고, 이 트랜스로 전압을 아주 낮게 해주면 가능할 거다.”
진순이는 아저씨한테 몇 가지 더 참고사항을 듣고, 니크롬선과 변압기, 전선과 얇은 플라스틱판 등 필요한 물건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때부터 화장실은 작업장으로 변했다.
진순이는 좌판 밑부분의 네 군데에 니크롬선을 깔아 연결하고, 얇은 플라스틱판을 받쳐 고정시켰다. 그리고 니크롬선의 양 끝에 전선을 이어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테이프로 감았다. 그런 다음에 트랜스의 2차 전압을 6V로 조절하여 연결시켰다. 본선에서 트랜스까지의 전압을 1차 전압이라 하고, 트랜스에서 조절되어 나오는 전압을 2차 전압이라고 한다. 물론 트랜스는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상자를 깔끔하게 만들어 그 안에 넣었다.
니크롬선과 트랜스의 상자를 만지는 동안 진순이의 손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차츰 따뜻해지는 변기의 좌판을 만져보는 순간 손에 난 상처의 아픔은 말끔히 씻겨졌다.
“진혁아, 어서 와 봐! 성공이야!”
욕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자 텔레비전을 보던 진혁이가 뛰어왔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는 듯이 형을 쳐다봤다.
“드디어 따뜻한 좌판을 만들어냈어! 자, 어서 앉아봐.”
“정말이야, 형?”
진혁이는 주춤주춤 바지를 벗어내려고 좌판에 올라앉았다. 그러더니 가시밭에 내려앉은 커다란 풍선이 터지는 듯이 소리를 꽥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앗 뜨거! 내 엉덩이를 로스구이 해먹으려는 거야, 형?”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엄마가 놀라서 달려오셨다.
“아니, 욕실에서 웬 소란이냐? 어머나! 이건 욕실이 아니라 숫제 철공소로구나! 어서들 치우고 숙제나 해라.”
진혁이는 투덜투덜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밖으로 나가버렸고, 엄마는 진순이의 머리에 아프지 않은 알밤을 한 대 먹이고는 부엌으로 가셨다. 좌판을 만져보니 아닌 게 아니라 무척 뜨거웠다.
‘전압이 너무 높았어. 3V로 낮춰 봐야지...’
2차 전압을 3V로 낮추고 몇 가지 손을 본 다음에 다시코드를 끼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따뜻해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좌판은 따스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차가운 그대로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쪼그려 앉아 있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회사에서 막 돌아온 차림의 아빠였다.
“어? 벌써 퇴근하셨어요, 아빠?”
“벌써라니, 이 녀석아.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데? 아니, 근데 이게 뭐냐?”
진순이는 그동안의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좌판을 손으로 만져보셨다. 심드렁한 몸짓으로 만져보던 아빠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면서 진순이를 쳐다봤다.
“따스한데?”
“너무 차거나 뜨겁지 않고요?”
“아니야. 이 정도로 차가운 기운만 가시면 되는 거야. 너무 뜨거우면 좌판이 타거나 녹아버리고 전기 소모도 많지 않겠니? 몇 가지 손만 보면 아주 멋진 발명품이 되겠다.”
진순이는 뛸 듯이 기뻤다. 순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냈다는 성취감이 주는 기쁨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특허권 출원을 해보면 어떨까요, 아빠?”
“글쎄다. 몇 가지 보완을 한 다음에 특허권보다는 실용신안권 출원을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되는 걸?”
진순이는 무엇보다 안전하고 볼품 있고 값싼 제품이 되도록 보완한 다음에, 특허출원을 해 볼 결심을 했다.
아름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빛이는 그 이름처럼 두 눈이 빛났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는 증거였다. 사실 빛이는 오빠한테 그 얘기를 듣는 동안 애기들이 앉기 싫어하는 이동식 유아용 좌변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애기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좌변기에 앉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빛이는 입을 다물었다. 구체적인 계획이 선 다음에 오빠한테 의논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말했다.
“그걸로 특허를 받으면 그 오빠 금방 유명인사 되겠네?”
“그럴 수도 있지.”
“우리도 발명만 할 게 아니라 특허출원까지도 생각해봐야겠어, 오빠.”
빛이는 특허출원을 해서 어느새 유명인사가 돼 있는 듯이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끼며 오빠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출처 : 발명하는 어린이들, 글수레=
|
왕연중의 발명동화
Designed by DOWO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