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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양 속의 보물
1
1952년 1월 노벨상 시상식장은 어느 때보다 더욱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류를 결핵의 공포로 부터 해방시킨 한 의학자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한평생 인류를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왁스만 박사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왁스만 박사의 집념어린 노력으로 탄생한 스트렙토마이신이 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간 결핵과 이질 설사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음은 물론 세균 연구에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에 우리 노벨의학상 심사위원단은 최고의 경의와 함께 왁스만 박사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바입니다.”
장내의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천천히 단상에 오르는 왁스만의 눈가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2
미국 뉴저지 주의 농사시험장의 연구실. 하얀 가운을 입은 한 연구원이 세균배양접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것참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오전 중에도 왕성히 번식을 계속하던 티푸스균이 미동도 않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두 죽어버린 것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온도·습도 모두 완벽했는데⋯ 잠깐 몇시간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다는 듯 다시 배양접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다섯 개의 접시 중 딱 한 개만이 정상적으로 번식을 거듭하고 있었고, 나머지 네 개는 완전 전멸상태였다.
“혹시?”
그는 다시 한번 배양접시를 천천히 관찰하였다.
“역시 그렇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배양접시에 넣은 흙 때문이군.’
완두콩의 뿌리 근처에 있는 토양을 약간 물에 풀어 4개의 배양접시에 섞어 놓았던 것이었다. 티푸스균이 완두콩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거꾸로 티푸스균이 전멸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연구원은 후에 노벨상의 영광을 안는 왁스만 박사. 그와 많은 이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실험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3
‘그런데 도대체 흙의 무엇이 세균을 죽인 것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균이 단순히 흙 때문에 전멸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왁스만은 배양접시에 담긴 샘플을 현미경으로 천천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배양접시에선 수많은 미생물의 무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이 많은 미생물중의 하나가 티푸스균을 죽인 걸 거야. 만약 어떤 녀석이 그런 힘을 가졌는지 밝혀낼 수만 있다면 질병 퇴치에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을 텐데.’
그는 한동안 현미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들 미생물의 화려한 움직임을 감상하였다. 그 무리들 중에 세균 박멸의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니 진정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
당시는 아직 세균과 미생물에 대한 연구가 초보적인 상태였다. 흙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미생물이 존재하고, 이들 간에 치열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과학자들은 이 영역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구대상의 크기가 워낙 작은데다가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왁스만이 관찰하고 있는 토양에만도 적어도 5천만 개의 세균이 있을 터였다.
‘과연 내가 이 많은 세균들 중에 주인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잠시 동안 망설였다. 이 많은 세균들을 일일이 구분하고 배양하고 실험을 하고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으려면 평생을 투자해도 모자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야. 내가 결과를 얻지 못한채 연구를 끝내야 한다고 하더라도 내뒤를 이어 다시 연구에 뛰어드는 이가 분명 있을 거야. 내 연구 성과는 그 초석이 되어 나중에 결국 빛을 발할 거야.’
왁스만은 드디어 결심을 한 듯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 세균과의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4
‘상처 치료 특효물질 발견.’
왁스만이 막 토양 미생물에 관심을 쏟을 무렵 프랑스로부터 낭보가 날아들었다. 프랑스의 세균학자 드뷔시 박사가 흙속에서 존재하는 프레이비스균을 이용하여 티로트리신이라는 물질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티로트리신은 포도상구균이나 연쇄상구균을 죽이는 효과를 가져 상처를 치료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나타냈다.
언론은 이 놀라운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미생물 연구의 본격적인 장이 열렸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드뷔시 박사의 개가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왁스만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정보였다.
그때까지 왁스만은 미생물 연구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메고 있었다. 너무나 분야가 크고 복잡해서 감히 접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균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물질이 결국 다른 세균을 죽이는 거로군. 그렇다면 나도 이런 특별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세균을 찾는데 주력해야 겠다.’
일단 가닥이 잡히자 그의 연구는 한층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여전히 상대해야할 세균의 수는 어마어마했지만 그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오로지 전진하였다.
5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연구는 하나의 출구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되는 실험 속에서 왁스만과 그의 파트너 셔츠는 세균에 특별한 작용을 하는 미생물을 발견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의 추측대로라면 그 미생물이 생성하는 물질은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많은 세균들을 사멸할 것이었다.
일단 첫 번째 배양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배양접시에는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듯 미생물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과연 내가 바라던 것일까?’
왁스만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아직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박사님. 자신을 가지십시오. 지금까지의 결과는 너무나 희망적입니다.”
셔츠는 밝게 웃어보였다.
셔츠의 말대로 모든 실험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이어진다면 페니실린보다 더 강력한 물질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 잠깐 이것 좀 보게”
왁스만은 현미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급하게 외쳤다. 배양을 끝낸 미생물을 관찰하고 있던 중이었다.
“놀라워!”
현미경의 렌즈아래서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포도상구균과 장티푸스균은 물론 이질 설사를 일으키는 적리균까지 몽땅 힘없이 죽어갔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다. 마른 침이 넘어갔다.
“성공이군요.”
셔츠는 감격에 겨워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렇군. 이제 동물 실험만 통과하면.”
왁스만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가 몰려와 숨을 쉴수 없을 지경이었다.
“까짓 동물실험이야. 문제없습니다.”
셔츠는 자신 있게 소리쳤다. 어디에도 암울한 실패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성공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6
“박사님, 박사님!”
셔츠가 숨 넘어 갈 듯 급하게 왁스만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엔 긴장감이 감돌아 예사 일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실험동물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충격이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확실한가?”
“직접 확인해보십시오. 아무래도 의약품으로는 적당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셔츠는 고개를 떨구었다. 성공을 기대했던 지난밤의 환희는 한갖 꿈처럼 지나가 버렸다.
그의 보고대로 실험물질을 주사한 흰쥐는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고 있었다. 너무 독성이 지나친 것이었다. 아무리 장티푸스균을 죽이는 획기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다른 생물체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연구는 순식간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7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승리를 확신한 뒤에 찾아온 실패의 쓴맛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무위에 걸린 풍선을 잡으러 올라갔다가 풍선은 놓치고 추락한 것 같은 심정이었다.
‘정말 허망하군.’
그는 말없이 배양접시가 그득히 쌓인 시험대를 바라보았다. 처음 미생물 연구에 메달리던 때의 일들이 새삼 떠올랐다.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맞아, 난 이 연구가 일생 계속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그래 아직도 많은 미생물들이 남아있어. 다시 힘을 내자.’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또다시 흙속의 세균들과 기약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실패는 그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다. 그는 웬만한 일에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세균을 관찰하고 배양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의 손을 거쳐간 미생물의 수가 1만을 훌쩍 넘었을 무렵, 왁스만은 세균을 죽이는 힘을 가진 약 1천개의 미생물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손을 거친 미생물의 10분의 1정도 되는 숫자였다. 다시 이 1천개에 대한 정밀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1천개 중 왁스만이 얻어낸 것은 겨우 10개의 미생물. 4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8
“도대체 이 시험관에 뭘 넣은 거지?”
왁스만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실험실을 흔들듯 울렸다.
장에 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이 남김없이 죽어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결과였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 뒤뜰의 토양에서 얻은 미생물을 투입했습니다.”
“뒤뜰? 샘플은 물론 남겨두었겠지?”
“물론입니다.”
셔츠가 건넨 시험관을 받은 왁스만의 눈이 다시금 빛났다.
“그 미생물이 과연 우리가 찾던 것일까요?”
“모르지. 하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은걸.”
왁스만과 셔츠는 이 정체불명의 미생물에 매달렸다. 도대체 이 미생물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떤 효과를 내는지 인체에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지 조사해야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왁스만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결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장티푸스균과 결핵균을 비롯하여 당시까지 어떤 약으로도 효력이 없었던 많은 균을 죽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전의 실패를 보상받는, 아니 그 이상의 성과였다.
그 미생물의 정체는 스트렙토마이세스 그리세우스.
페니실린을 뛰어넘는 놀라운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처음의 실패와 같은 부작용도 없었다. 의약품으로 응용한다면 페니실린 이상으로 많은 고귀한 생명을 구할 것이었다. 왁스만은 이 놀라운 미생물에서 얻은 물질을 스트렙토마이신이라고 이름 지었다.
9
1944년 어느 날, 전 세계 신문은 일제히 인상적인 기사를 실었다.
‘장티푸스와 결핵을 퇴치할 새로운 물질 스트렙토마이신 개발.’
커다란 제목 옆에 환하게 웃는 왁스만의 사진이 실리고 결핵정복에 대한 희망찬 기사가 뒤를 이었다. 결핵에 신음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세계는 놀라움에 그리고 기쁨에 젖었다. 많은 이들이 왁스만의 놀라운 공적에 경의를 표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왁스만의 끈질긴 도전이 많은 이를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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