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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동의보감
Ⅰ
450여 년만 늦게 태어났으면 노벨의학상을 타고도 남을 정도로 의학계에 혁명을 일으킨 이름난 한의사 허준. 허준이 완성한 동의보감은 그의 깊은 철학과 넓은 경험이 응축된 것이기에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까지 지금도 계속 번역판이 발간되고 있다. 특히 30여 년 전부터는 첨단의학을 자랑하던 미국과 유럽에서까지도 중요한 의서 중의 하나로 발간되어 그 찬연한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에 특허제도만 있었으면 백여건의 의약특허도 받았을 것이 분명한 허준. 동의보감 25권에 담긴 보배같은 내용들은 동양제일의 명의였던 그를 400년이 지나서야 세계제일의 명의로 끌어올리고 있다.
Ⅱ
1546년에 태어나 1615년(광해군 7년) 8월 13일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허준. 그의 호는 구암, 자는 청원, 본관은 양천이다. 그는 비록 천첩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집안 만은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무과에 급제하여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낼 정도로 명성을 떨치던 집안이었다.
문제는 어머니가 정실이 아닌 첩이라는 것. 이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서자라는 미천한 신분의 굴레가 씌워져 아버지를 아버지라고도 부를 수 없는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적자와 서자의 차별 제도가 왕명으로 엄격하게 적용되어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었다.
서자 출신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기껏해야 의학, 천문학, 수학 등 정치와 무관한 과학에 관련된 벼슬과 역관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허준의 총명함과 영특함은 주변에 따를 자가 없었다. 같은 또래의 적자들이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때 그는 이미 천자문을 뗄 정도였다.
“이 일을 어찌하누. 적자로만 태어났으면 약관안에 과거의 장원급제를 하고도 남을 놈인데⋯”
아버지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신분 차별 제도가 원망스러웠지만 왕명으로 지켜지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더욱이 자식이 아버지인 자신을 ‘나리’라고 부를 때는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준아, 그래 너는 장차 무슨 일을 하고 싶은고?”
아버지는 아무도 몰래 허준을 불러 자리를 같이했다.
“나리, 소인은 의술을 배워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되는 것이 소망이옵니다. 보살펴 주시옵소서.”
“그래?!⋯”
아버지로부터 허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할아버지는 그 길로 허준을 데리고 기인으로 소문난 의사 유의태를 찾아 손자를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총명하고 영특하기 이를데 없는 놈이요. 거두어 주시요.”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유의태는 불쑥 허준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천자문은 떼었는고?”
“예.”
“그럼. 하늘천(天)과 땅지(地)자는 무엇을 뜻하는고?”
“예, 글자와 뜻은 상반되오나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만이 세상의 모든 조화도 이루어질 수 있는 줄로 아옵니다.”
유의태의 질문은 반 시각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허준의 대답은 유의태의 질문을 한발 앞서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의술을 물려줄 제자를 찾고 있던 유의태는 갑작스러운 허준과의 만남에 크게 만족했다.
“의술은 곧 인술이자 천술이니라. 손끝에 익힌 의술은 죄악이야. 몸과 마음을 바쳐 익히도록 할찌어다.”
유의태의 가르침은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허준 역시 그 같은 가르침이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다. 허준은 유의태의 의술뿐만 아니라 학덕과 인덕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익혔다.
Ⅲ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허준은 스승인 유의태를 능가하는 명의가 되어 있었다. 이어 그는 의과 과거에 급제하여 이듬해인 1575년 궁중의 내의원 의관이 되었다. 임금까지도 인정하는 명의가 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어의로서 임금(선조)을 평양, 의주의 피난길까지 뒤따르며 지성으로 보살폈으며, 후일 그 공로로 호성공신 3등에 올랐다.
전쟁 후의 결과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전쟁으로 인한 난민들의 굶주림과 못된 전염병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설상가상으로 귀중한 서적마저 불타버려 당장 필요한 의서까지 남아난 것이 없었다.
“그대는 짐의 생명의 은인이로다. 이제 백성들을 위해 큰일을 해주어야겠오.”
허준의 의술을 인정하고 백성들의 질병을 걱정한 선조는 그로 하여금 모든 의서를 정리하여 의학의 체계를 세울 수 있는 책을 저술할 것을 명하였다.
허준은 서둘러 ‘동의보감’ 저술에 착수했다. 때는 1596년. 그러나 다음 해 겨우 저술방침을 결정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 저술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준은 왕명을 받은 책임감과 그가 평생 이룩하기를 소원했던 저술작업이었으므로 난리 중에도 홀로 연구에 몰두했다.
Ⅳ
허준은 난민들의 전염병 치료와 왕실 치료의 공적으로 61세에 양평군에 봉해지고 동시에 승록대부에 올랐으나 천첩의 자식에게 당상관의 벼슬을 줌이 불가능하다고 사간원에서 거세게 반대하는 바람에 취소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불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동의보감이 한창 저술되고 있을 무렵 선조가 승하한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누명을 쓰게된 것이다. 임금의 치료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선조가 승하했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과 동시에 귀양을 가야만 했다.
사간원에서는 사약을 내려야 한다고까지 항소했으나 새로 임금에 오른 광해군은 파직과 귀양만으로 마무리 지었다.
귀양생활은 비참했다. 특히 늙은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생활이었다. 그러나 허준의 저술 활동은 오히려 활기를 띄고 있었다. 누구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허준은 마침내 25권에 달하는 방대한 명서인 동의보감을 마무리지었다. 1610년(광해군 2년) 9월의 일로서 무려 14년에 걸친 각고 끝에 탄생한 노력의 결정체였다.
V
동의보감의 특징은 책의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허준은 서문을 통해 ‘중국의 의학서가 부족한 곳이 많아 모든 의학서를 참고하여 다시 저술한다’고 전제하고, ‘우리나라에 흔한 약재를 많은 사람이 활용할 수 있도록 분류하여 정리했다’고 설명하고, ‘모든 병은 섭생에 원인이 있으니 수양을 먼저하고 아울러 약을 처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동의보감의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이 자랑하는 ‘본초서’보다 한발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약재의 기원은 물론 약효와 산지까지 저술되어 있음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탕액본초’편에 실려있는 4백2종의 약재 중 90종의 약재는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여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허준은 약재의 국산화에도 정열을 쏟았다. 중국에서 수입하던 감초, 마황, 영릉향, 안식향 등에 대한 재배시험과 대용 약재를 개발한 결과를 동의보감에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의사이자 발명가이자 식물학자였던 허준. 요즘 광고에서까지 ‘동의보감 원방에 의한 우황청심환’과 ‘동의보감 원방에 따른 쌍화탕’이라고까지 강조되는 동의보감. 허준의 동의보감은 우리 한의학의 진가를 전 세계에 심어준 불멸의 업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허준의 공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왕실과 양반 중심으로 쓰여진 의서들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한글판으로 저술하기도 했다. 태산집요, 언해구급방, 창진집요 등이 그것으로, 여기에서 그의 깊은 박애 정신도 엿볼 수 있다.
동의보감은 1613년 관판으로 개간되어 그 초간본이 지금도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다.
우리 민족이 자랑할 수 있는 ‘세계 의학 백과사전’으로 자리를 굳힌 동의보감의 저술인 허준.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한 공로로 임금에게서 말 한 필을 상으로 받았다. 또한 어의헌 대부지중임부사와 양평군 승록대부에 봉해지는 영예를 차지했다. 그리고 1615년 8월 13일 눈을 감을 때까지 백성들의 질병 치료를 멈추지 않았다.
45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공로가 재평가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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